[kjtimes=정병철 대기자]1970년대 일부 정치인들은 성곡이 골프를 통해 대권 의지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로 인해 성곡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었다.
1971년 10월 2일은 성곡은 생애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었다. 일명 ‘10. 2항명’ 파동이었었던 그날 성곡이 주동자로 지목 된 것이다.
1971년 9월 30일 신민당은 물가고, 사법파동, 광주대단지사건 등의 책임을 물어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오치성 내무장관과 신직식 법무장관의 해임건의안을 발의했다.
신민당이 제출한 해임 건의안에 공화당 중진 김성곤 의원이 포함돼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민당 해임결의안에 공화당 중진들도 동참 할 것이라는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그 전날 청와대로 김성곤씨 등 4명의 의원을 불러 부결시켜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김성곤은 이를 무시하고 가결표를 던졌으니 대통령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성곡은 10. 2 항명은 국민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역사적 의사 표출이었다고 주장했다. 성곡은 특히 3부 장관은 물가고 등 사회불안을 야기 시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변함이 없었다.
성곡은 이 같은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전 공화당 사무총장 길재호, 김창근 의원 등과 함께 골프를 하면서 결속을 다졌다.
박 대통령은 훗날 이들이 골프를 하면서 항명계획을 한 사실을 알고 그 다음 또 태연하게 골프를 치고 있다는데 분노하며 골프장에 중앙정보부 수사요원들을 급파해 연행해 갔다.
1971년 이른바 10. 2항명파동이 있은 후 성곡은 그 다음 날에도 골프장을 찾았다. 10월 3일 성곡은 서울컨트리서 길재호(전 공화당 정책위의장)와 김창근(전 공화당의원) 등 10. 2 항명파동의 주역들과 라운딩을 하며 또다시 화합을 과시했다.
성곡 등은 대통령의 부결 지시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과 오치성 내무장관, 신직수 법무장관에 대해 해임가결을 한 것은 당과 대통령을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며 서로에 대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서로에 대한 격려도 잠시뿐. 갑자기 골프장에는 전운이 감돌 정도로 싸늘했다. 전반 홀을 돌 즈음 성곡의 비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필드로 달려 왔다.
“위원장님, 이곳에 곧 각하가 오신답니다.” 라는 비서의 보고를 받고는 성곡은 얼른 골프를 중단하고 골프장을 재빨리 빠져 나왔다.
만약 골프장에서 대통령과 마주쳤으면 더욱 대통령의 분노를 살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성곡 역시 대통령이 그만큼 부결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자신들이 가결에 표를 던졌으니 대통령에 대한 항명으로 비쳐 질 수밖에 없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10월 2일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의 해임안은 부결됐지만 오치성 내무장관은 가 100, 무 90, 무효 6표로 가결되자 박대통령은 성곡의 가표 결행은 당과 자신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