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times=정병철 대기자]1971년 ‘10. 2항명’ 으로 인해 정계를 떠난 성곡 김성곤 회장은 그토록 좋아했던 골프도 치지 않았다. 성곡은 사업에만 전념하겠다고 결심하고 쌍용을 세계적 기업으로 육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성곡이 정치권을 떠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팔을 자르는 아픔으로 성곡을 자르긴 했지만 그는 우리의 영원한 벗이며, 다른 분야에서 국가에 훌륭히 봉사 할 것으로 믿는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성곡은 10. 2 항명 이전까지만 해도 둘도 없는 정치적 동지였다. 박정희는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는 성곡의 경제관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공화당 재정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국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둘은 남달리 운동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인해 골프장에서 가끔 만나 라운딩을 하곤 했다. 박 대통령은 성곡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거침없는 그의 성격과 한 잔의 술이라도 들어가면 분위기를 돋우는 성곡은 대통령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박 대통령이 군자리 코스를 자주 찾은 것도 성곡이 서울컨트리 이사장으로 재임 해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곡은 1969년 4월 27일, 서울컨트리 정기 총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그 즈음 박 대통령은 골프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측근들에게 “성곡이 서울컨트리 이사장이라 골프는 마음껏 해도 되겠구먼”하며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대통령의 행차는 말이 골프장 나들이지 한마디로 청와대를 골프장으로 옮겨놓을 정도였다. 이는 대통령이 골프장으로 한 번 올 때마다 경호실 직원은 물론 비서진까지 따라와야 하는 등 식비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더욱이 서울컨트리는 각종 토지 민원으로 인해 종업원들의 봉급마저도 빠듯하는 등 적자의 폭이 컸다.
그러니 대통령 경호실 직원과 비서진들이 대통령 라운딩 동안 기다리며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대접해야 하는 등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그 비용을 청와대 예산에서 쓸 수도 없는 처지였다.
결국 성곡이 이에 대한 총대를 맺다. 성곡은 청와대 경호실 요원과 비서진들이 먹는 음식 대금은 ‘자신의 이름 앞으로 달아 놓아라’ 하는 등 그 모든 비용을 자신의 개인 호주머니를 털어 계산을 했다.
성곡이 음식 값을 계산 산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자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평소 그와 안면이 있는 사람마저도 식사를 한 후 성곡 이름으로 외상 하는 등 성곡은 기업을 운영하면서 남는 돈은 골프장 음식계산에 다 쏟아 부울 정도이었다.
성곡은 이처럼 서울컨트리 이사장에 재직하면서 박 대통령과 청와대 경호실 비서관들의 식대를 자비로 부담하는 등 우의를 보였지만 10. 2항명이 있은 후부터는 박 대통령과의 라운딩은 영영 물 건너갔다.
성곡은 서울컨트리가 1954년 재개장한 이후 산적해왔던 문제점들을 말끔히 해결하는 등 골프장 운영에도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