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인물정보]故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

[KJtimes=장우호 기자]故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1920년 5월 6일 강원도 통천군에서 故 정봉식과 故 한성실 사이 6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현대그룹을 일군 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1953년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입사해 정주영 명예회장을 도와 현대건설 초석을 다지는 동시에 독자적으로 한라그룹을 창업했다. 1962년 현대양행과 만도기계 설립, 1978년 한라시멘트 설립, 1981년 한라건설을 설립했으며 1984년부터는 한라그룹의 회장을 역임했다.

14세가 되던 해 무작정 상경해 야간 YMCA에서 야간 영어과 2년을 다닌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스스로 학비를 마련해가며 아오야마(靑山)학원대학 야간 영어과를 다니다 2학년 때 중퇴하고 귀국해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로 활동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란길에 올라 대구에서 한 일간지 편집일을 했다. 이후 미군 사령부 통역에 지원해 공병대 장교 통역을 맡았다.

한국전쟁 동안 형 정주영 명예회장을 도와 현대건설을 키웠다. 당시 미8군이 발주한 토목공사는 현대건설이 거의 독점했는데, 미8군 공병대의 장비 상당수를 불하(拂下)받은 데다 영어에 능통한 정인영 명예회장이 큰 활약을 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직원 100명이 채 안 되던 중소기업이었다.

현대건설은 휴전 이후 국내 공사 수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공사를 잘못 수주하는 바람에 미군 공사에서 벌어들인 돈을 몽땅 날렸지만 1957년 한강 인도교 공사를 수주하면서 ‘건설 5인조’에 들어갈 만큼 성장했다.

정주영 명예회장과 함께 현대건설의 초석을 다지고 있었던 1962년 현대양행을 설립해 한라그룹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1980년 10월 정부의 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공기업으로 전환되면서 사명을 한국중공업으로 변경했다.

1976년 12월 9일 현대양행 당시 건설부로부터 승인받은 창원종합기계공장을 계획대로 건설했다. 이 공장은 단일 공장으로는 최대 규모인 130만평 부지에 지어져 주위를 놀라게 했다.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다. 출장길이나 차 안에서 이동할 때도 영자 신문은 물론, 경제경영 관련 책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중풍으로 쓰러진 뒤에도 경영에 소홀하지 않기 위해 엄청난 정신력을 발휘해 ‘휠체어의 부도옹’ ‘오뚝이 기업인’ ‘프런티어 기업인’ 등 별명을 얻었다.

1989년부터 장남 정몽국에게 한라그룹 부회장을 맡겼지만, 1994년 말 차남 정몽원을 그룹 후계자로 지명했다.

다른 현대가와 달리 정 명예회장의 두 아들이 모두 교회에서 배우자를 찾은 것 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혼맥이 없다.

1992년 3월부터는 중앙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출강하기도 했다.

배우자 김월계 여사와 슬하에 2남1녀를 뒀다.

장남 정몽국 엠티인더스트리 회장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인 정인영 명예회장이 동생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뒤 1995년부터 그룹 경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유학갔다.

동생 정몽원 회장이 정몽국 회장의 한라시멘트, 한라콘크리트 보유 지분을 동의 없이 양도한 것에 대해 2003년 1월 한라시멘트 등을 상대로 주주위치 확인 등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을 제외한 2심과 대법원 상고심에서 정몽원 회장의 손을 들어주자 한라그룹을 떠나 2007년부터 5촌 당숙의 회사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차남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영학 학사,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경영학 석사를 거쳤다. 1979년 현대양행에 입사해 본격적으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어 1985년 만도기계 전무, 1989년 같은 회사 사장, 1992년 한라그룹 부회장을 거친 후 1997년 그룹 회장에 올랐다.

무리하게 추진했던 조선사업이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그룹 회장 취임 1년 만에 '그룹 해체'라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았다. 이 과정에서 정 회장은 계열사인 한라건설 회장으로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1999년 만도를 매각한 뒤 8년 만에 되찾았다. 한라중공업 불법지원과 관련해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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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생년월일: 1920년 5월 6일~2006년 7월 20일
직업: 기업인
직함: 한라그룹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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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정보

관계 

이름 

생년월일 

비고 

부 

정봉식 

 

 

모 

한성실 

 

 

형 

정주영 

1915년 11월 25일~2001년 3월 21일 

현대그룹 창업주 

남동생 

정순영 

1922년 12월 12일~2005년 10월 13일 

성우그룹 명예회장 

여동생 

정희영 

1925년~2015년 7월 16일 

 

남동생 

정세영 

1928년 6월 6일~2005년 5월 21일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남동생 

정신영 

1931년~1962년 

 

남동생 

정상영 

1936년 12월 7일 

KCC그룹 명예회장 

배우자 

김월계 

1923년 12월 25일~2003년 11월 20일 

 

장녀 

정형숙 

 

 

장남 

정몽국 

1953년 10월 2일 

엠티인더스트리 회장 

자부 

이윤희 

1954년 

전 한라대학교 총장 

차남 

정몽원 

1955년 8월 4일 

한라그룹 회장 

자부 

홍인화 

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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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정보

롱아일랜드대학교 인문학 명예박사(1991년)
중앙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1991년)
전남대학교 법학 명예박사(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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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정보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
현대건설 부사장(1953년)
현대양행 사장(1962년)
현대건설 사장(1969년)
현대아메리카 사장(1970년)
한라건설 사장(1978년)
인천조선 사장(1980년)
만도기계 사장(1980년)
한라자원 사장(1980년)
주한 키리바티 명예총영사(1983년)
한라시멘트 사장(1984년)
한라자원 회장(1987년)
한라그룹 회장(1988년)
중앙대학교 객원교수(1992년)
한라건설 명예회장(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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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정보

제27회 한국경영대상 한국의 경영자상(1995년)
목포시 명예시민(2011년)
제18회 창업대상 대상(2012년)








[스페셜 인터뷰]‘소통 전도사’ 안만호 “공감하고 소통하라”
[KJtimes=견재수 기자]“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변화는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공감과 소통이 어려워진 것이다.(공감과 소통의) 의미가 사라지고 충동만 남게 됐다.” 한국청소년퍼실리테이터협회(KFA: Korea Facilitators Association)를 이끌고 있는 안만호 대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디지털 사회로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해 이 같이 진단했다. 또 이제 공감능력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면서 비대면 사회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소통 전문가로 통하는 안 대표는 “자신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스마트폰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사회성은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지식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며 “요즘 인간의 탈사회화가 진행되는 것에 비례해 인간성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코로나 사태는 사회적 거리를 두더라도 우리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이자 연대라는 점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졌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