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인물정보]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KJtimes=장우호 기자]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는 1920년 2월 11일 인천에서 직물도매상을 하던 故 조명희씨와 故 태천즙씨 사이 4남4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1967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1972년 중화학술원으로부터 철학 명예박사, 1987년 프랑스 루앙대학교에서 경영학 명예박사학위 등을 받았다. 1944년 집안 어른의 중매로 평범한 집안의 김정일 여사와 결혼했다.

193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38년 국비 교육기관이었던 진해고등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20세 때 일본으로 건너 가 2등기관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후지나가다조선소에 입사했다. 1942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 목탄차 엔진을 수리하는 이연공업사를 차렸으나 태평양전쟁 때 일제가 기업정비령을 통해 강제매입했다.

이연공업사를 정리할 때 받은 보상금과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산 화물차 한대로 1945년 해방 이후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주로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화물을 담당했다. 설립 2년 만에 화물차 10대를 보유하면서 영등포-인천 간 카바이트 총대리점을 맡았다. 1947년 교통부로부터 경기도 일원에 대한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정식으로 받고 충청도와 강원도 일대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1950년에는 종업원 40명, 화물차 30대, 화물운반선 10척을 보유한 운송전문회사로 자리를 잡았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유하고 있던 화물차 중 피란용으로 한대를 제외하고 모두 징발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뛴 경험 덕분에 1957년 다른 운수회사를 제치고 주한미8군과 7만달러짜리 군 수송물자 수송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한국인 운송업자들이 전시상황을 핑계로 물건을 빼돌리는 경우가 많아 미군은 국내기업과 운송계약 맺는 것을 기피했으나 조 창업주는 운송 도중 사고가 발생할 경우 모든 피해금액을 배상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미군과의 운송계약을 맺었다.

미군 점퍼를 운송하던 한 운전기사가 트럭에 실려 있던 점퍼를 남대문 시장에 팔아넘기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미군 담당자가 물건을 확인하지 않고 서류에 사인을 한 사건이 있었다.

조 창업주는 물건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사인을 한 미군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지만 직원들을 시켜 남대문 시장에 운전기사가 빼돌린 점퍼들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책임 유무를 떠나 돈 보다 중요한 것이 신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진상사의 직원들은 남대문 시장을 수소문해 빼돌려진 점퍼를 모두 구매했고, 이렇게 회수한 점퍼들을 아무조건 없이 미군에게 양도했다.

이 사건으로 한진상사는 큰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지만 미군으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미군과 쌓은 신용을 통해 이후 한진상사는 미군으로부터 더 많은 운송계약을 따낼 수 있었고, 이후 미군 운송권을 독점하다시피 해 연 평균 300%씩 급성장했다.

1960년에는 한해 계약만 220만달러에 달하고 가용차량이 500대에 이르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해에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주월미군과 하역 및 수송계약을 체결하고 5년간 1억50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한 가용외화가 5000만달러 남짓이었다.

1961년에는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매입해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해 한진고속의 발판을 다졌다. 1967년 자본금 2억원으로 대진해운을 설립하고, 같은해 삼성물산의 동양화재해상을 5억7000만원에 인수했다.

1968년 한국공항과 한일개발을 잇따라 설립했다. 1969년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27억원의 부채를 보유하고 있던 만년적자 공기업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독촉해 항공사업에 뛰어들었다. 사명을 대한항공으로 바꾸고 서울-오사카-타이베이-홍콩-사이공-방콕 등을 연결하는 동남아시아 최대 노선을 개설했다.

1977년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부실회사인 대한선주를 인수합병해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1987년 법정관리에 들어가 있던 조선공사를 인수, 육해공을 가리지 않는 수송전문기업의 기반을 닦았다.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대한항공에 대한 고강도 제재 의사를 내비쳤다. 국적항공사인 대한항공이 잇단 사고를 내면서 국가 이미지에 미치는 악영향이 적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박정희 정권부터 김영삼 정권까지 우호적 관계를 이어왔던 조 창업주에게는 처음으로 미운털이 박힌 셈이다.

당시 한진그룹은 국세청 조사인력 240여명이 동원된 3개월간의 세무조사를 받는가 하면 대한항공은 노선권 배분 차별 등 정부로부터 각종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나 사법부는 대한항공이 잇따라 제기한 노선 배분 소송에서 대부분 정부 결정을 뒤엎는 판결을 내려 이를 정상화했다.

1999년 4월 22일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2002년 11월 17일 인하대 부속병원에서 82세 일기로 타계했다.

팔순의 나이에도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지 않고 현장을 챙길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창업주에게 은퇴란 없다”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남이 닦아놓은 길을 뒤쫓으며 훼방하는 얌체사업, 문어발식 확장사업을 경계했다. 낚싯대를 열개, 스무개 걸쳐 놓는다고 고기가 다 물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식교육에 엄격해 인성에서는 검소와 성실을, 일에서는 프로를 강조했다고 한다. 4형제 모두 대한항공에서 경영수업을 시작하게 했지만 전공과 성격을 감안해 각자 주요 계열사를 맡겼다.

그룹의 주력 업종인 대한항공은 전문 기술의 이해가 필요한 만큼 공대 출신인 조양호 회장에게, 국내 대학 출신에 성격이 걸걸한 조남호 회장에게는 한진중공업을 맡겼다. 故 조수호 전 회장에게는 국제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한 한진해운을, 금융분야 공부를 해온 조정호 회장에게는 메리츠증권을 맡겼다.

배우자 김정일 여사와 슬하에 4남1녀를 뒀다.

장녀 조현숙씨는 1958년 숙부인 故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중매로 이태희 서울지방법원 판사와 혼인했다. 이태희 변호사는 흥아타이어 감사를 지냈던 이상묵씨의 장남으로 서울대 법대와 미국 하버드대 법학박사 출신이며 법무법인 광장을 설립한 변호사다.

장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인하대학교를 나와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군 제대 직후인 1973년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장녀 이명희씨와 결혼했다. 이씨는 서울대 미대 출신이다. '땅콩 회항'으로 물의를 빚었던 조현아 부사장을 딸로 두고 있다.

차남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은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김원규 전 교육감의 차녀 김영혜씨와 테니스를 치다 인연을 맺어 연애결혼했다. 한일개발 때부터 평생을 중공업계에 몸담았다.

삼남 故 조수호 전 한진해운 회장은 롯데가와 인연을 맺었다. 최현열 전 NK그룹 회장과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의 넷째 여동생 신정숙 여사의 딸 최은영씨와 결혼했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대한항공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2003년 한진해운을 물려받아 회장을 맡았으나 3년 뒤인 2006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듬해 배우자 최은영 회장이 한진해운을 이어받았으나 파산에까지 이르게 했다.

사남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고 대한항공에서 경영수업을 받다가 1989년 한일증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줄곧 금융계에 몸담아 왔다. 1987년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차녀 구명진씨와 혼인했다. 이 혼인으로 LG가, 삼성가와 재계 혼맥을 이었다.


=====================================================================================

기본정보

생년월일: 1920년 2월 11일~2002년 11월 17일
직업: 기업인
직함: 한진그룹 창업주


=====================================================================================

가족정보

관계 

이름 

생년월일 

비고 

부 

조명희 

1895년~??? 

 

모 

태천즙 

1895년~??? 

 

형 

조중렬 

1915년 6월 14일~1999년 4월 19일 

전 한일개발 부회장 

여동생 

조정옥 

1922년 

전윤진 전 동양화재 감사 배우자 

여동생 

조정원 

1924년 

사업가 박두진 배우자 

여동생 

조도원 

1928년~2007년 9월 5일 

박태원 전 한국과학기술원 이사장 배우자 

여동생 

조경숙 

1929년 

박소희 재미외과의사 배우자 

남동생 

조중건 

1932년 12월 29일 

화암재단 이사장 

남동생 

조중식 

1935년 2월 28일 

전 한진건설 사장 

배우자 

김정일 

1923년 7월 28일~2016년 12월 15일 

 

장녀 

조현숙 

1944년 

이태희 변호사 배우자 

장남 

조양호 

1949년 3월 8일 

한진그룹 회장 

차남 

조남호 

1950년 2월 12일 

한진중공업 회장 

삼남 

조수호 

1952년 6월 21일~2006년 11월 26일 

전 한진해운 회장 

사남 

조정호 

1954년 9월 1일 

메리츠금융지주 회장 



=====================================================================================

학력정보

휘문고등학교 중퇴(1936년)
진해고등해원양성소 기관과(1938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1967년)
중국문화대학 명예철학박사
루앙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1987년)
한국해양대학교 명예공학박사(1995년)


=====================================================================================

경력정보

한진상사 설립(1945년)
한진관광 설립(1961년)
대진해운 설립(1967년)
동양화재해상보험 이사회 회장(1967년)
한국공항 설립(1968년)
한일개발(現 한진중공업) 설립(1968년)
인하학원 이사장(1968년)
대한항공 대표이사 사장(1969년)
주한마다가스카르 명예총영사(1970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1971년)
한진그룹 회장(1972년)
대한관광협회 중앙회 초대 회장(1972년)
한·불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1974년)
재일동포 모국방문추진위원회 이사(1976년)
한진해운 설립(1977년)
정석학원 이사장(1979년)
한국항공대학교 초대 이사장(1979년)
동양항공사협회(OAA) 의장(1980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조직위원(1981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 위원(1982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협회 연합회장(1983년)
한국 유네스코협회연맹 초대 회장(1983년)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1984년)
한·불 수교백주년기념사업회 위원장(1985년)
국제민간경제협의회 부회장(1988년)
인하학원 이사장(1992년)
한·불 최고 경영자서클 명예회장(1992년)
전국 경제인연합회 고문(1993년)
제7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서울지부 부의장(1995년)·
제8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서울지부 부의장(1997년)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1998년)


=====================================================================================

수상정보

제3회 수출의날 대통령표창(1966년)
제4회 수출의날 은탑산업훈장(1967년)
제5회 수출의날 금탑산업훈장(1968년)
제6회 수출의날 군납해외진출 최고상(1969년)
제7회 수출의날 최고상(1970년)
주한말라가시 명예총영사(1970년)
제1회 해운의날 국무총리표창(1977년)
프랑스 1등공로국민훈장(1977년)
제12회 조세의날 대통령표창(1978년)
제1회 항공의날 수교훈장광화장(1981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1982년)
벨기에 레오폴드훈장(1986년)
국민훈장 모란장(1988년)
미국 버클리대학교 경영대학원 국제최고경영자상(1988년)
몽골 북극성훈장(1992년)
주한아일랜드 명예총영사(1995년)
네덜란드 명예훈장(1996년)
프랑스 그랑오피시에 훈장(1996년)
독일 십자공로대훈장(1998년)








[스페셜 인터뷰]‘소통 전도사’ 안만호 “공감하고 소통하라”
[KJtimes=견재수 기자]“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변화는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공감과 소통이 어려워진 것이다.(공감과 소통의) 의미가 사라지고 충동만 남게 됐다.” 한국청소년퍼실리테이터협회(KFA: Korea Facilitators Association)를 이끌고 있는 안만호 대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디지털 사회로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해 이 같이 진단했다. 또 이제 공감능력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면서 비대면 사회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소통 전문가로 통하는 안 대표는 “자신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스마트폰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사회성은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지식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며 “요즘 인간의 탈사회화가 진행되는 것에 비례해 인간성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코로나 사태는 사회적 거리를 두더라도 우리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이자 연대라는 점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졌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