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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골프행정을 집대성 한 박두병 회장

[kjtimes=정병철 대기자]고 박두병 두산그룹 회장(1910∼1973)은 전환기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영원한 기업인이며 경제인이요, 골프인이었다.

 

박 회장은 부친이 경영하는 (주)박승직상점에 입사해 경영자로서 첫 출발을 했다. 동양맥주, 두산산업, 동산토건, 두산기계 등을 설립해 두산그룹의 터전을 닦았으며 합동통신사를 인수, 언론계에도 공헌하였던 게 박 회장이다.

 

그런 박 회장이 국내 골프 행정에도 기업 경영 못지않은 탁월한 경영행정을 펼친 기업인이었다. 오늘날 국내 골프행정은 박 회장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는 골프행정을 집대성 한 사람이었고 골프 개척자였다.

 

박 회장은 두산 총수로서 부귀와 영예를 누렸지만 전혀 재벌의 화려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늘 소박함과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고 오늘날 재벌 2세니, 3세들과는 살아가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박 회장은 30대 중반부터 골프에 입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나이면 골프에 늦게 입문한 것이 아니다. 박 회장은 골프 입문을 아주 우연찮게 했다.

 

원래 박 회장은 호전적 운동인 승마를 좋아했다. 말을 타고 산과 들을 달리며 담력과 기백을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승마를 즐기던 박 회장은 그만 말에서 떨어져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훗날 두산그룹을 이끌고 갈 아들 박두병이 말을 타다가 발목이 부러졌다는 소리에 아버지는 흥분한 나머지 “당장 승마를 그만 둘 것”을 지시했다. 박 회장은 그런 아버지의 지시가 워낙 거세 순순히 승마에서 손을 땠다.

 

운동을 좋아한 그는 승마마저 포기하자 무료함을 느꼈는데, 어느 아버지로부터 골프채를 선물 받았다. 성격이 깐깐하면서도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을 삼가며 개인적인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골프는 그의 적성에 딱 맞는 운동이었다.

 

그가 골프에 입문한 이때가 1934년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다닐 때였으니 그의 골프시작은 국내 골프의 태동기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골프장은 1929년 오픈한 군자리코스였다. 그는 이곳에서 간간히 골프를 쳤는데 골프의 재미는 못 느꼈다.

 

박 회장이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한 때는 1949년 서울컨트리가 재건되면서였다. 박 회장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날에도 천일약국 조권중 사장과 골프약속을 한 것을 보더라도 그는 골프에 푹 빠져 있었다.

 

박 회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울컨트리가 재오픈하자 그린위원장으로 선출될 정도로 골프행정에 탁월했다. 그를 강력히 천거한 사람은 부총리와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했던 장기영씨 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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