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times=정병철 대기자]정주영 회장은 골프입문이 늦은데다 노령에 골프를 배워기 때문에 쉬쉬하며 쳤다.정 회장은 레슨도 혼자 몰래 해왔다. 무엇보다 운동신경이 뛰어나서 혼자해도 별무리가 없었다. 다른 운동도 한 번 눈여겨 보면 금방 따라 하는 실력을 갖고 있을 정도로 그의 운동신경은 탁월하다. 그러나 정 회장은 나이와 구력에 비해 상당한 골프실력을 소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창 그가 골프에 심취해있을 때는 핸디 18로 보기플레이를 했다. 연습과 라운딩 회수에 비해 그의 보기플레이는 상당한 수준급이었다.그는 나이에 맞지 않게 호쾌한 장타형으로 힘껏 내려치는 스윙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공이 정통으로 잘 맞으면 ‘굿샷’이요, 못 맞으면 ‘미스샷’이 종종 나온다.그래서 정 회장은 드라이버를 하기 위해 골프를 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번
[kjtimes=정병철 대기자]정주영 회장은 자는 시간을 제외 하고는 일에 열중한다. 정 회장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자서전을 통해 불굴의 정신, 창의적인 노력, 진취적 기상을 통해 오늘날 현대를 일구어 왔다고 했다.그런 그의 기업가 정신은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골프를 자연히 등한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골프를 할 시간에 골프장 건설을 도맡으며 국내 골프장 건설에 앞장 서 왔다.정 회장은 사실 “골프쯤이야“ 하며 골프를 편안한 스포츠로 생각 했다. 정 회장이 젊은 시절부터 즐긴 운동은 묵직하고 기술과 테크닉이 필요한 종목이었다. 예컨대 씨름 럭비 테니스 등은 파워와 기술이 동시에 필요한 운동이다. 때문에 그는 골프는 나이 들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운동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는 한 번 운동을 하면 땀이 온몸을 적셔야 적성이 풀리는 체질이
[kjtimes=정병철 대기자]고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은 뜻한 것을 모두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 회장은 골프와 정치에서만큼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두 가지는 돈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골프는 끊임없는 노력과 반복된 훈련이 필요하고 대통령직은 하늘이 점지 해야만 오를 수 있는 자리다. 대통령직은 그렇다 치더라도 인위적인 노력만 있으면 정복하는 골프는 왜 정복 못했을까. 정 회장은 타고 난 스포츠맨이다. 신장 1m75 체중 75kg인 그의 체력이 말해주듯 그는 못하고 안해 본 운동이 없다. 구기종목인 축구 농구 배구는 물론 수영 탁구에도 소질이 있다. 특히 정 회장은 씨름과 테니스는 수준급이다. 그의 나이 70인 고회 때만 해도 20대 팔팔한 현대 신입 사원들과 씨름을 해 져 본적이 없다. 또 테니스에서 강서브는 웬만한 아마추어 실
[kjtimes=정병철 대기자]노태우 전 대통령은 유독 일동레이크CC를 좋아했던 것 같다. 노 전 대통령이 이 골프장 관련, 소문이 난 것은 이 골프장이 국내 다른 골프장과 코스와 조경에서 뭔가 다르다며 골프장 관계자들을 격려하면서다.이 골프장은 1996년 US여자 오픈 대회인 삼성월드챔피언전을 개최 한 사실 하나만을 보더라도 골프장이 세계적 수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이 이 골프장을 탐낼 만도 했다는 게 주변의 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노 전 대통령은 최종현 회장 등 주변 사람에게 “퇴임하니 무료한데 이곳에서 나무와 잔디를 가꾸며 골프나 쳤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고 한다. 훗날 무심코 내뱉은 이 말 한마디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노 전 대통령이 골프장 인수했다니 비자금이 그곳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등 엄청난 의혹의 골
[kjtimes=정병철 대기자]선경그룹 자본이 노태우 전 대통령 돈으로 둔갑돼 왜 포천골프장 유입설이 나왔는가. 이 문제는 ‘일동레이크GC가 선경그룹 소유냐 아니냐’는 문제로 집약 될 수도 있다. 골프업계는 이미 이 골프장의 실질적인 소유주는 최종현 회장이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골프장의 설명은 좀 다르다. 한마디로 “선경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그런 소문이 나도는가에 대해 선경측의 설명은 “단지 선경그룹에서 많은 회원권을 구입했기 때문에 선경이라는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선경은 회원권만 대량 구입했지 골프장이라는 덩어리는 인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골프종사자들의 설명이었다. 회원제 골프장에서 주인은 회원이다. 특히 선경
[kjtimes=정병철 대기자]최종현 회장은 1988년경 김승학 프로를 만난 후 체계적인 골프레슨을 받으면서 골프에 더욱 눈을 떴다. 최 회장이 환갑이 지난 나이에 다시 골프레슨을 받기로 한 것은 다른 재벌 총수들의 실력은 일취월장하는데 자신의 실력은 떨어지고 있다는 데 자극을 받아서였다.최 회장은 김 프로로부터 레슨을 새롭게 받은 이후 덕분에 전경련 골프모임에서도 골프 하나 만큼은 ‘똑’소리 나게 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최 회장이 김승학 프로를 만나면서 또 다른 골프세계에 눈을 뜨는데 다름 아닌 골프장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최 회장은 그룹의 골프장 필요성에 대해선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김승학 프로를 만나면서 그룹도 골프장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인식 전환을 하게 된다.그래서 선경은 90년대 초 김승학 프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골프장이었던
[kjtimes=정병철 대기자]최종현 전 회장은 1954년 미국 위스컨신 대학 재학 시절에 골프에 입문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 대학은 학사과정에 선택과목으로 골프가 있었다. 그 후 최 회장은 1959년 미국 시카고대학원을 졸업 할 때까지 미국에서 줄곧 골프를 해 왔다. 선진 골프문화를 일찍 접한 탓인지 최 회장은 골프기본기 만큼은 완숙했다. 최 회장의 골프 주특기는 신장 175cm, 체중 80kg이라는 신체적 조건 때문에 드라이버라 말 할 수 있지만 실제 그는 숏게임에 강하다.숏아이언과 칩샷은 프로선수 버금 갈 정도로 잘해 함께 라운딩을 한 사람들은 탄성을 자아 낸다. 드라이버도 장타에 속했다. 최 회장은 폐암 수술을 받기 전인 1996년만 해도 주말이면 골프장에서 살았다. 우선 그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라는 신분 때문에 다른 재벌 총수들과 골프약속을 하며 필드에서 재계
[kjtimes=정병철 대기자]“아마도 그가 재계 총수가 되지 않았으면 ‘도선’이 됐을 것이다.”선경그룹(현 SK그룹)회장이자 전경련 회장이었던 고 최종현 회장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1987년 아주 우연찮게 친구의 소개로 시작 하게 된 단전호흡은 최종현 회장 건강과 삶의 일부가 되다시피 했다. 단전호흡을 시작한지 10년째인 최 회장은 하루의 일과를 단전으로 시작해서 단전으로 끝낸다. 최 회장이 단전호흡을 오래 한 탓인지 항시 얼굴은 홍조 빛을 띠고 있다. 그러나 최 회장이 단전에 빠져 들기 전만 해도 다른 재벌 총수들과 똑같이 골프를 건강관리로 여기는 총수였다. 그런데 단전호흡에 빠져 들고 나서는 골프보다 단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최 회장은 샷을 하더라도 심호흡을 크게 하고 기를 모은 후 공을 후려친다. 처음에 최 회장과 함
[kjtimes=정병철 논설주간/대기자] 프로레슬러 이왕표 선수가 위독하다. 지난 14일 새벽부터 8시간에 걸쳐 암 수술을 받은 후 회복기미를 보였던 이 선수 상태가 갑자기 악화돼 27일 저녁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28일 한국프로레슬링 연맹 관계자에 따르면 27일 오후부터 동맥경화 증상으로 인해 피가 입과 코로 터져 나와 이날 오후 6시부터 28일 새벽 두시까지 약 8시간에 걸친 긴급 수술을 받았다고 전했다. 현재 이 선수는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의식이 불안정하다. 한국프로레슬링연맹 최두열 실장은 “병원측이 ‘현재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는 상태다. 며칠 더 경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고 전해왔다. 앞서 이 선수는 지난 14일 새벽 담낭암 수술을 받았었다. 담도암은 췌장암과 함께 경과가 좋지 않은 암으로 알려져 있다. 담도암으로 진단 받은 환자 중 수술
[kjtimes=정병철 대기자]구인회 회장은 레슨 받길 권하는 얘기가 나오면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레슨은 무슨 레슨…, 이렇게 골프장에 와서 걷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답니다”라며 레슨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양 사돈으로부터 놀림을 받은 후부터는 레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골프장에서 양사돈 간의 우의는 훗날 방송 사업관계로 공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삼성과 럭키는 서울과 동양 TV방송국을 합작키로 하며 방송 사업에 뛰어 들었다.그런데 삼성이 이를 독식하자 구 회장은 “사돈 사이에 동업을 약속해 놓고 독식해도 되냐”며 반발을 보였다. 이에 구 회장은 방송 사업에서 손을 떼고 삼성이 독자적으로 방송 사업을 추진해 갔다.이로 인해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쌓아온 관계는 물론 골프모임에도 금이 갔다. 구 회장은 사업을 함에 있어서도 인간적 관계
[kjtimes=정병철 대기자]구 회장의 골프세계를 얘기하자면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서부터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구 회장과 이 창업주는 사돈지간이 된다. 구회장은 지난 1957년 재계의 비상한 관심 속에 삼남인 자학씨를 이 회장의 차녀이며 현 이건희 회장의 손위누이인 숙희씨와 혼인을 시켜 재벌끼리 직사돈 관계를 맺었다. 둘이 사돈을 맺게 된 그 이면에는 골프를 치면서였다고 한다. 워낙 골프를 좋아한 둘은 골프장에서 자식의 혼례 얘기를 하다가 내친김에 서로가 사돈을 맺는 게 어떠냐는 농담조의 얘기가 실제 혼인으로 이어졌다.서로가 사돈이 된 후로는 허물없이 골프를 쳤고 사업적 동반 관계를 골프를 통해 풀어 나갔다. 아울러 둘의 골프모임에 전 국회의장 이재형씨도 빠질 수 없는 멤버였다. 이재형씨와 구 회
[kjtimes=정병철 대기자]구인회 회장은 국내 최초 민간 기업 소유 9홀 골프장을 완성하는 쾌거를 맛보았다.구 회장은 골프이외 다른 스포츠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특히 축구를 좋아한 구 회장은 보통학교 시절 축구선수로도 활약을 했다. 구 회장은 효성물산 조홍제 회장과는 보통학교 시절부터 축구로 우의를 다졌다. 그러나 각각 경영 최고 일선의 장이 된 후로는 둘은 골프를 치며 우의를 다졌다. 구 회장은 경영을 아는 사업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골프를 아는 진정한 골퍼였다. 구 회장은 뇌종양이라는 암에 걸려 일본서 치료를 받았지만 효험을 보지 못했다. 구 회장은 이 병이 큰 병인 줄도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머지 일본에 가서 한 번쯤 종합 진찰은 받아보라는 주변의 권유도 듣지 않았다.그런데 구 회장은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자고 권유를 하면
[kjtimes=정병철 대기자]구인회 회장은 일찍 골프장 사업에도 눈을 떠 국내 최초로 자가 시설로 골프장을 만든 장본인이다. 구 회장은 호남정유 여수단지 안에 9홀이긴 하지만 국내 최초로 기업 단지에 골프장을 세웠다.이 9홀 코스는 서울컨트리, 부산, 한양 다음으로 만들어진 유서 깊은 골프장으로 기업 단지 내에 골프장이 들어섰다 해서 당시 대단한 화제였다. 구 회장은 우리나라 남서해안 끝에 골프장을 왜 만들었을까. 자신이 이곳에서 골프를 치면서 많은 기업인과 사교를 하기 위해 서울과 떨어진 구석진 이곳에 골프장을 만든 것은 아니다.구 회장은 여수 호남정유 단지에 골프장을 만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정유공장 사업은 지금의 원자력 사업 못지않은 국가 핵심 사업 이다. 이 사업은 국내 기술진 보다 외국 기술진에 의해 사업이 리드된다. 외국서 온
[kjtimes=정병철 대기자]‘상대방의 본심을 파악하려면 골프를 쳐라. 골프를 쳐 보면 상대방의 순순한 마음과 됨됨이를 알 수 있다.’ 럭키그룹(현LG그룹)창업주 고 구인회 회장과 골프를 쳐 보면 이 말이 실감난다. ‘과연 이 분이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과 쌍벽을 겨뤘던 사업가이었던가’ 탄성이 절로 나온다.서울컨트리 회원들은 “평상시 구회장은 치밀하고 깐깐한 사업가의 제치를 유감없이 발휘하지만 필드에만 들어서면 재벌 총수의 멋도 사치성도 없는 전형적인 농사꾼 아저씨였다”고 평가한다.구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이고 이병철 회장 이재형씨 등과 함께 자주 골프를 쳤던 국내 골프계의 산증인이다. 그러면서 그는 검소하고 알뜰한 골프를 친 표본이었다. 구 회장은 우리나라 골프의 첫 장을 연 서울컨트리 군자회 주요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당
[kjtimes=정병철 대기자]1953년 18명의 설립동의자가 모여 재창립한 서울컨트리는 1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회원 수가 1023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골프장 회원 수가 이처럼 증가한 원인에는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린 탓도 있지만 성곡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었다. 성곡은 1969년 4월 27일 서울컨트리 구락부 제15기 정기총회 및 29일에 있은 제1회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이날의 선출 방식은 투표가 아닌 구두 호칭으로 인한 만장일치 박수로 추대했다. 새로 출범한 진용은 다음과 같다. 부이사장에는 이병두, 박용학, 운영위원장 함성용, 경기위원장 박건석, 룰위원장 김치렬, 재정위원장 최용관, 핸디캡 위원장 김정렬, 캐디위원장 성상영, 후생위원장 권철현, 이밖에 이사에는 구인회, 허정구, 박종규, 민관식 등 18명으로 구성 됐었다. 성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