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times=정병철 대기자]1971년 ‘10. 2항명’ 으로 인해 정계를 떠난 성곡 김성곤 회장은 그토록 좋아했던 골프도 치지 않았다. 성곡은 사업에만 전념하겠다고 결심하고 쌍용을 세계적 기업으로 육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성곡이 정치권을 떠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팔을 자르는 아픔으로 성곡을 자르긴 했지만 그는 우리의 영원한 벗이며, 다른 분야에서 국가에 훌륭히 봉사 할 것으로 믿는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성곡은 10. 2 항명 이전까지만 해도 둘도 없는 정치적 동지였다. 박정희는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는 성곡의 경제관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공화당 재정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국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둘은 남달리 운동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인해 골프장에서 가끔 만나 라운딩을 하곤 했다. 박 대통
[kjtimes=정병철 대기자]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성곡이 이른바 ‘10. 2항명 파동을 했다는 것은 자신과 당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성곡은 그 다음날 골프를 하면서 모든 책임은 자신과 길재호 위원장이 지기로 한 비장한 결심을 결의했었다. 그들이 골프를 치면서 그런 논의를 하는 와중에 급보가 날아왔다. 박 대통령이 골프장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이들은 모두 골프장을 빠져나갔다. 다음은 신용남씨의 회고.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지금 각하가 서울컨트리로 가니 그곳에서 대기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죠. 10.2 항명으로 인해 각하의 마음이 편치 않아 골프를 하면서 분노를 삼키려나 생각했습니다. 잠시 후 대통령은 굳은 표정을 하며 골프장에 도착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골프장에 오면 주변 사람들을 격려 하는 등
[kjtimes=정병철 대기자]1970년대 일부 정치인들은 성곡이 골프를 통해 대권 의지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로 인해 성곡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었다. 1971년 10월 2일은 성곡은 생애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었다. 일명 ‘10. 2항명’ 파동이었었던 그날 성곡이 주동자로 지목 된 것이다. 1971년 9월 30일 신민당은 물가고, 사법파동, 광주대단지사건 등의 책임을 물어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오치성 내무장관과 신직식 법무장관의 해임건의안을 발의했다. 신민당이 제출한 해임 건의안에 공화당 중진 김성곤 의원이 포함돼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민당 해임결의안에 공화당 중진들도 동참 할 것이라는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그 전날 청와대로 김성곤씨 등 4명의 의원을 불러 부결시켜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김성곤은 이를 무시하고 가결표를 던졌으니 대통
[kjtimes=정병철 대기자]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억지골프가 어느 정도인가.190년대 초 서울컨트리에서 성곡과 김형욱은 내기골프를 했다. 말이 내기골프지 거의 도박골프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김형욱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가령 공이 러프에 들어가면 캐디를 시켜 재빨리 페어웨이로 공을 던지게 한다든지, 페어웨이라도 주변에 장애요인이 있으면 공을 발로 건드린 후 위치를 바꾸는 등 그 수법은 다양했다. 내기 골프에서 이기기 위해 김형욱은 캐디는 변칙에 능숙능란한 사람을 골라 썼고, 상대방이 무매너와 억지에 이의를 제기하면 오히려 더 큰 소리로 “그 정도 양해않고 무슨 골프를 쳐” 하며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이쯤 되면 국내서 내로라 프로라도 김형욱과 골프를 하면 이길 수 없다. 실제 그와 함께 골
윤창중이 기자회견에선 “허리만 툭 쳤다”고 해명했다가 청와대 민정수석실 조사에서 “인턴 여성 엉덩이를 만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윤창중의 성 추행이 점입가경이다.‘청와대 입’ 윤창중이 박근혜 대통령 방미 기간에 그런 추행을 했다면 그가 공직자가 아니었을 때는 어땠을까. 윤창중 성추행 사태를 지켜보면서 아마도 대한민국 권력층이나 공직자 중 ‘뜨끔’ 했을 사람들이 더러 있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은 여성 엉덩이뿐만 아니라 여성의 더한 곳에 추악한 손을 들이대지 않았을까.사실 여성 엉덩이를 한 대 툭 쳤다는 것만으로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 국격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고, 박근혜 정권의 도덕성까지 타격을 입힐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권력층 인사들과 술을 주거니받거니 한다. 그럴 때 가끔 엉덩이
[kjtimes=정병철 대기자]성곡은 여야 정치인 막론하고 두루 골프를 쳤다. 그중 특히 장기영씨와 각별한 사이였다. 둘이 어느 정도 가까웠냐면 승용차를 보면 안다. 당시 국가경제를 주도했던 둘은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닐 법도 한데 꼭 지프를 타며 국회와 골프장을 누볐다. 지프를 타는 사람의 성격이 활동적이고 소탈하고 도전적이라 할 때 두 사람은 성격 면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둘은 서울컨트리 동우회인 ‘목동회’ 소속이었는데 항상 ‘실과 바늘’처럼 같이 다녔다. 원래 성격이 비숫한 사람끼리는 친한 법인데 둘은 차이점도 많았는데 이는 성격과 골프실력에서 그대로 드러났다.장씨는 성격이 급해 상대방이 얘기하면 중간에 말을 막고 “아, 알았습니다”하는 타입이었다. 반면 성곡은 상대방의 얘기를 끝까지 다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kjtimes=정병철 대기자]성곡 김성곤 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술고래(?)’였다. 정치인이고, 경제인이고 성곡의 술에 녹다운 안된 사람은 없었다. 신용남씨와 골프 시합에서 졌던 성곡은 술로 한판 붙자며 신씨에게 술 도전장을 내밀었다. 신용남씨 역시 당대의 술꾼이었다. 제안을 마다 할 리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혹시 어리석은 내기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도 앞섰다. 왜 그랬을까. 신씨의 증언이다. “사실 성곡의 술 끈기를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어 ‘좋습니다’라는 시원한 말을 못했다. 대신 ‘정, 그렇다면 하시죠…’라며 머뭇거리며 받아 들였다. 성곡의 술 승부를 받아들인 것도 나 역시 술은 골프 뭇지 않게 자신 있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성곡과 술 대결이 벌어졌다. 성곡은 골프장에서 진 오기를 술로 달래 보고자 ‘큰 잔으로 마시자’고 제안
[kjtimes=정병철 대기자]쌍용그룹 창업주 성곡 김성곤 회장은 영원한 체육인이요, 골퍼였다. 성곡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 고 이병철 삼성 그룹 전 회장 등과 함께 골프에서 만큼 많은 일화와 화제를 낳았다. 성곡 주변에 얽힌 골프얘기를 압축해서 정리하자면 술에 얽힌 에피소드를 빼놓을 수 없다. 성곡은 술과 골프가 없이는 못사는 호주가였다. 호탕한 그의 성격 탓에 골프는 즐기고, 건강유지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이기기 위해 골프를 했다. 그의 ‘이기자’ 정신은 학창시절부터 운동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 된 것이었다. 성곡은 운동에서 만큼 ‘2등은 없다’는 철저한 ‘1등 지향주의’이었다. 때문에 상대방을 꺾고 정상에 오르기 위해 체력과 기술이 꼭 필요하다고 믿어왔다.성곡은 운동에서 꼭 1등을 해야만 스트레스도 풀리고 또 건강관리에도
[kjtimes=정병철 대기자]OB컵 골프대회는 우리나라 최초 스폰서 경기였다. 다음은 골프계 원로 신용남씨의 회고.“OB컵 대회는 서울컨트리를 명문골프장으로 도약시킨 연강 박두병 회장의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회원들이 우정의 표시로 창설한 대회인데 이 대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서울컨트리 최고의 대회로 자리를 잡았다. 1년에 한 번 있는 클럽 챔피언대회는 물론이요, 월례경기 때나 친선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연강은 OB맥주를 공짜로 보내 마시도록 했다. 훗날 회원들 사이엔 공짜맥주를 마시기 위해선 서울컨트리로 가자는 말이 유행 할 정도이었다. 또 일부 사람들은 OB맥주는 공짜술 정도로 기억했다.”OB컵 대회에서 공짜 술을 준 탓인지 각종 에피소드도 넘쳐흘렀다. 맥주는 서서히 취하는 데 멋모르고 술을 과다하게 마신 경기 참석자들은 술에 취해 라운딩을 포기하
[kjtimes=정병철 대기자]‘두산하면 OB맥주’, ‘OB맥주 하면 연강 박두병 회장’을 연상케 한다. 다름 아닌 박 회장은 OB맥주 창업자였다. 박 회장 부친은 일제 때 거부인 박승직씨였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서 입지해 서울 종로 4가에서 대가를 이룬 자수자족한 인물이었다. 부친은 종로에서 박 회장을 낳자 처음부터 사업가로 키울 작정이었다. 때문에 경성상고를 졸업케 한 후 조선은행에서 근무했고, 일치감치 골프를 시켰는데 이는 사업가로 육성시키기 위한 의도된 과정이었다. 박 회장은 조선은행에 근무하면서 장기영·백두진·김영찬씨 등을 만나 교우관계를 맺었는데 그 인연이 죽을 때가지 이어졌다.지금의 두산이라는 명칭이 만들어 진 것은 두산 창업 50년째인 1946년이었다. 창업주인 박승직씨는 아들에게 “네 이름 가운데 자인 ‘斗’ 자를 넣어 두산상회라 하라.
[kjtimes=정병철 대기자]박두병 회장에게 일명 골프3인방이 있었다. 김용관·손기원·민용규였다. 박 회장의 골프이야기는 3인방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1929년 3월 나란히 경성상고에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수업도 같이하고 행동도 같이 했던 의리파 친구들이었다.이들의 의리가 어느 정도였냐면 경성상고 1학년 때에 월미도로 소풍갔을 때 ‘죽을 때도 같이 죽자’고 의리 맹세까지 했다고 한다. 이들은 결혼식 때는 서로가 들러리를 섰고, 6. 25때는 달달 거리는 군용트럭으로 함께 피난길에 오를 정도로 동고동락 했다. 이들 4인방 중 골프를 가장 일찍 시작한 사람은 박 회장이었다. 박 회장은 친구 3명을 서울 군자리 코스에 불러 모아 골프 기술을 가르쳐 주면서 골프에 입문 시켰다. 이들은 서울컨트리가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으로 옮길 때 까지 대략 1000번 이상 라운딩 했
[kjtimes=정병철 대기자]박두병 회장은 골프매너를 금과 옥처럼 지켰다. 제 아무리 골프를 잘 쳐도 매너가 불량하면 골퍼로 인정을 안했다. 다음은 한장상 프로가 밝힌 연강의 골프 에티켓.“서울컨트리 5번 홀서 세컨샷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친구가 앞 팀이 그린에 올라가 있다며 쳐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린까지는 약 220m이 넘는 거리였으므로 그린에 있는 앞 팀의 경기 진행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스푼으로 세컨샷을 날렸죠.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볼이 맞는 순간 굿샷임을 직감했는데 거의 직선에 가깝게 죽 뻗은 나간 볼은 그린을 오버하고 말았습니다. 그린에서 막 폼을 잡고 퍼팅하려던 골퍼가 깜짝 놀라 모자를 벗어 들고 소리를 지르더군요. 순간 ‘아차 실수했구나’ 하고 미안한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팀은 6번 홀 그늘 집에서
[kjtimes=정병철 대기자]지난 1966년 9월23일 그랜드호텔에서 서울컨트리의 박두병, 최세황, 박건석, 김치열, 김동준, 한홍과 한양골프장의 김형률, 남영식, 민병도, 부산컨트리의 구인회, 장삼철, 박경구 등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골프협회를 창립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이날 초대 회장으로 박두병씨가 선출됐다. 이렇듯 한국골프협회가 창립되면서 이제까지 서울CC에서 대행해 왔던 모든 골프계의 행정은 자동으로 한국골프협회로 이관됐다.박 회장이 주축이 돼 창립한 한국골프협회는 현 대한골프협회 전신으로 한국 골프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초창기 때는 국내 프로골퍼와 아마추어골퍼들을 육성하는데 구심점 역할을 했다.협회는 매 4년마다 개최되는 영미 합동위원회의 룰 개정 결과를 국내 골프계에 통보하는 등 국제적 흐름에 보조를 같이 하는 등 국내 골프계
[kjtimes=정병철 대기자]박두병 회장은 지난 1965년 4월 장기영씨에 이어 서울컨트리 제3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박 회장은 애초 이사장 취임을 사양했는데 워낙 저돌적으로 밀어 붙이는 2기 장기영 이사장에 의해 강제로 떠맡다 시피 했다. 장 이사장은 “이사회가 전형위원에 전권을 위임한 이상 우리는 그 결정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구나 박 회장의 경력, 공적 그리고 인격을 생각할 때 최적임 이사장이라 생각합니다”라며 막무가내로 박 회장을 이사장으로 추대했다.이렇게 해서 이사장에 취임한 박 회장은 현 대한골프협회 모태인 한국골프협회를 창립하는 등 국내 골프발전의 모태를 마련했다. 박 회장은 서울컨트리에 이어 부산컨트리가 1956년에 개장한 뒤 1964년에는 한양컨트리까지 오픈하자 “한국에도 골프장을 대변할 만한 기관이 있어야 한다”며 골프
[kjtimes=정병철 대기자]고 박두병 두산그룹 회장(1910∼1973)은 전환기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영원한 기업인이며 경제인이요, 골프인이었다. 박 회장은 부친이 경영하는 (주)박승직상점에 입사해 경영자로서 첫 출발을 했다. 동양맥주, 두산산업, 동산토건, 두산기계 등을 설립해 두산그룹의 터전을 닦았으며 합동통신사를 인수, 언론계에도 공헌하였던 게 박 회장이다. 그런 박 회장이 국내 골프 행정에도 기업 경영 못지않은 탁월한 경영행정을 펼친 기업인이었다. 오늘날 국내 골프행정은 박 회장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는 골프행정을 집대성 한 사람이었고 골프 개척자였다. 박 회장은 두산 총수로서 부귀와 영예를 누렸지만 전혀 재벌의 화려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늘 소박함과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고 오늘날 재벌 2세니, 3세들과는 살아가는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