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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골프비화/고 박두병 회장]‘한국 최초 타이틀 스폰서 골프대회 유치’

[kjtimes=정병철 대기자]OB컵 골프대회는 우리나라 최초 스폰서 경기였다. 다음은 골프계 원로 신용남씨의 회고.

 

“OB컵 대회는 서울컨트리를 명문골프장으로 도약시킨 연강 박두병 회장의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회원들이 우정의 표시로 창설한 대회인데 이 대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서울컨트리 최고의 대회로 자리를 잡았다. 1년에 한 번 있는 클럽 챔피언대회는 물론이요, 월례경기 때나 친선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연강은 OB맥주를 공짜로 보내 마시도록 했다. 훗날 회원들 사이엔 공짜맥주를 마시기 위해선 서울컨트리로 가자는 말이 유행 할 정도이었다. 또 일부 사람들은 OB맥주는 공짜술 정도로 기억했다.”

 

OB컵 대회에서 공짜 술을 준 탓인지 각종 에피소드도 넘쳐흘렀다. 맥주는 서서히 취하는 데 멋모르고 술을 과다하게 마신 경기 참석자들은 술에 취해 라운딩을 포기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OB맥주를 빗대는 말도 많았는데 골프에서 ‘OB낫다는 말은 OB맥주를 많이 마셨기 때문’이라며 OB컵 챔피언이 되기 위해선 OB맥주를 적게 마셔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OB컵 대회는 맥주뿐만 아니라 그린피, 식사, 음료수는 물론 경기 경비까지 OB측에서 지불하는 등 국내 최초 스폰서 대회 역할을 충실히 했다.

 

당시 OB컵 대회가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는지 경쟁사인 크라운 맥주에선 자신들도 공짜로 술을 대 줄 테니 ‘크라운컵’ 대회를 창설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나 서울컨트리 이사회에선 이를 논의한 끝에 OB컵 하나로만 대회를 열기로 해 크라운컵 대회는 개최되지 못했다. 오늘날 OB맥주가 ‘국내 맥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때부터 아닌가 싶다. 그만큼 OB맥주는 많은 골퍼들의 추억어린 술이기도 하다.

 

박 회장의 골프업적을 평가할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희생정신이었다. 그의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서울컨트리는 수작농에 의해 벌써 폐쇄됐을 것이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던 날, 서울컨트리는 발칵 뒤집혔다. 골프장은 데모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골프장을 폐쇄시켜라’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성난 군중들은 삽과 곡괭이를 들고 골프장내로 진입 골프장을 마구 잡이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서울컨트리 이사진들은 골프장으로 달려가 성난 군중들을 설득시켰지만 막무가내이었다. 이들은 “혁명이 일어났으니 내 땅을 찾아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 데모 이유였다. 장기영과 박두병은 성난 군중 사이에 뛰어 들어 협상을 시작, 1억환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군중들을 해산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서울컨트리 토지는 재판으로 이어졌는데 다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면서 존폐여부가 현안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서울컨트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장기영씨를 이사장에, 수석 부이사장에는 박 회장을 선임해 골프장이 보존되도록 했다.

 

서울컨트리를 둘러싼 민원이 원만히 해결되자 박 회장은 장기영씨에 이어 1965년 4월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서울컨트리 관리 체제를 기업형으로 전환시켰다. 박 회장은 사무실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집행부 직원의 신분 보장을 해주는 등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었다.

 

박 회장이 이사장으로 재임 시 서울커트리에 도난사고가 발생했다. 물건을 도난당한 회원은 도둑놈을 잡아라 등 연강에게 항의하는 등 골프장은 시끌벅적 했다. 연강은 그 항의를 받은 즉시 도둑을 잡았는데 그가 도둑 잡은 기술은 해고 조치이었다.

 

도둑이 라커룸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연강은 라커실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을 해임 했다. 이에 라커 직원들은 자신들이 도둑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도둑을 잡아 박 회장에게 데려갔다. 그 이후로 한 건의 도난 사고도 발생치 않았다.

 

박 회장은 골프장다운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샤워장에 비치한 로션이나 머릿기름의 냄새를 맡아 보고 향기가 나쁘면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으라고 하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또 서울컨트리 필드에 있는 두 개의 간이식당에서 파는 모든 음식의 신선도를 체크하는 등 회원들에게 신선한 음식을 제공키 위해 노력을 했다.

 

골프장에 나온 박 회장은 걸음걸이 하나로 누구나 박두병 이사장임을 알아본다. 연강은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오른팔은 30도쯤 몸에서 벌린 채 앞뒤로 활발히 흔들면서 그린 필드를 걸어 다녔다.

 

그런 박 회장은 어느 날 취장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는데 당시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가 중앙병원장이었던 민병철 박사였다. 수술 후 8일 만에 재수술에 성공한 박 회장은 10년 동안이나 큰 탈 없이 살았다.

 

만약 그때 수술이 잘못됐으면 박 회장은 일찍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때의 인연이었을까. 민병철 박사는 지금도 박두병 회장 일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데 박용곤 명예회장과는 절친한 사이다. 연강은 비록 63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경제인으로, 국내 골프를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다음은 쌍용그룹 창업주 김성곤 회장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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