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인물정보]故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

[KJtimes=장우호 기자]故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는 192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故 김재민씨와 故 오명철 여사의 4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천안북일사립학교와 직산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경기공립학교에 입학한 뒤 원산공립상업학교로 편입해 1941년 졸업했다. 사업을 한창 크게 키우던 1970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형인 故 김종철 전 국민당 총재가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배우자 故 강태영 여사와의 인연이 이뤄졌다. 양가는 이미 집안 간 혼인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장남이 결혼을 미루자 부친이 차남인 김 차업주에게 혼인을 강요한 것이다.

1942년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하면서 화약과 첫 인연을 맺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떠나자 지배인 자격으로 이 회사를 인수해 미 군정청 등으로 판로를 개척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조선화약공판을 인수할 새로운 회사법인이 필요해짐에 따라 1952년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53년 서울 회현동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1956년 인천화약공장을 복구해 1957년 다이너마이트 원료로 쓰이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생산, 1958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자체생산했다.

이후 한화의 인천공장은 경부고속도로 등 기간산업에 필요한 화약을 공급하며 2006년 가동을 중단할 때까지 폭약 124만톤, 뇌관 11억개, 도화선 7억7000만미터를 생산했다.

1964년 한화테크엠의 전신 신한베어링공업을 인수하고 1965년 한화케미칼의 전신인 한국화성공업을 설립했다. 1968년 진해에 1만5000톤 규모의 PVC 공장 및 PVC 가공 공장을 세웠다. 1969년 SK인천석유화학의 전신인 경인에너지개발을 설립했다.

1973년 그가 손 댄 회사 가운데 유일하게 성격이 다른 대일유업을 인수했다. 기간산업을 고집했던 김 창업주의 고집에도 “축산농가가 쓰러지고 있다”는 정부의 집요한 설득 때문이었다. 대일유업은 사명을 빙그레로 변경한 뒤 1976년 아이스크림을 출시해 큰 인기를 얻었다.

1974년에는 김포요업을 설립하고 1975년에는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란 취지에서 학교법인 천안북일학원을 설립해 이듬해 3월 6일 천안북일고등학교를 개교했다.

1977년 11월 11일 한화의 다이너마이트 등 민수용 화약을 대량으로 싣고 가던 열차가 이리역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한화의 화약열차는 이리역에 도착한 뒤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하기 위해 4번 입환대기선에 머물러 있었다. 호송원 신무일씨는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통과시켜야 하는 원칙을 무시하고 수송을 늦추고 있다며 이리역 측에 항의했지만 묵살됐다.

이리역 앞 식당에서 음주를 한 뒤 열차로 돌아온 신씨는 열차 안이 어둡자 양초에 불을 붙여 화약상자에 세워 놓은 뒤 잠들었는데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폭발한 열차에는 당시 다이너마이트 상자 914개(22톤), 초산암모니아 상자 200개(5톤), 초안(硝安) 폭약 상자 100개(2톤), 뇌관상자 36개(1톤), 합계 1250상자 30톤분이 실려 있었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이리역 구내에는 깊이 15m, 직경 30m의 큰 웅덩이가 패였다.

전라북도가 집계한 열차 폭발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 등 총 1402명에 달한다. 피해 가옥 동수는 전파가 811동, 반파가 780동, 소파가 6042동 등 공공시설물을 포함한 재산피해 총액이 61억원에 달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 수만도 1674세대 7873명이나 됐다.

이리역 폭발사고 직후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구성되어 재해 복구 활동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천막촌을 건설하여 이재민을 수용했고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1977년 11월 19일 ‘새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정부는 피해 복구액으로 50억 원을 책정했으나 김 창업주는 90억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피해 보상금으로 내놓고 사고 수습에 최선을 다했다.

김 창업주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미국 마당발이었다. 화약부문이 방위산업이 연관이 많아 주한미군, 미국대사관 등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1960년대 후반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와 인연을 맺고 호형호제했다. 리처드 스틸웰 전 주한 미군사령관과도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창업주는 워커 전 대사의 60세 생일을 한국식 환갑잔치로 열어주기로 했지만 1981년 타계하면서 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차남 김승연 회장이 1982년 워커 전 대사의 환갑잔치를 열고 2002년 팔순잔치도 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김종희 창업주는 생전에 “남자는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워보고 그래야 해. 어차피 될 놈은 무엇을 하든 간에 나중에 제대로 되니까. 남자의 과정은 여자와 다르지”라고 했다고 한다.

지병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1981년 7월 23일 갑자기 타계했다. 자녀에 대한 재산분배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김 창업주 타계 후 장남 김승연 회장과 차남 김호연 전 회장이 재산분쟁을 벌였다.

두 형제는 1992년부터 3년6개월간 무려 31차례에 달하는 재판을 벌였다. 김호연 전 회장은 주요 계열사 경영에서 밀려난 데 반발해 형을 상대로 재산권 분할소송을 제기했다. 김호연 전 회장은 김승연이 본인과 의논하지 않고 임의로 상속재산을 처분했다며 유산의 40%를 달라고 주장했다.

이에 김승연 회장 측은 “1981년 당사자 간의 합의 등 민법상의 합법절차를 밟아 상속재산이 분배됐고 10년 시효가 끝나 상속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두 형제는 법정다툼을 이어오다 1995년 할머니 장례식 때 만나 모친의 설득 끝에 재산분할에 합의하고 소송도 모두 취하했다.

배우자 강태영 여사와 슬하에 2남1녀를 뒀다.

장녀 김영혜 전 제일화재해상보험 이사회 의장은 유일하게 김 창업주 타계 전에 혼인했다. 남편은 故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 부장의 차남 이동훈씨다. 이씨는 한화에너지 부사장으로 근무하다가 김 창업주 타계 후 경영에서 손을 뗐다.

장남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경기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간 뒤 미국 멘로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이후 드폴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김 회장은 부친 타계 1년 후인 1982년 당시 내무부 장관으로 있었던 서정화 자유한국당 상임고문의 장녀 서영민씨와 결혼했다.

김 창업주가 갑자기 타계하면서 20대의 젊은 나이에 한화그룹의 경영을 맡게 됐다. 10대 그룹 총수 가운데 최연소이자 장수기록을 갖고 있다.

차남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한 뒤 일본 히토쓰바시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 김미씨와 결혼해 김구재단을 설립했다. 빙그레 회장을 지냈으며 천안에서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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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생년월일: 1922년 11월 12일~1981년 7월 23일
직업: 기업인
직함: 한화그룹 창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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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정보

관계 

이름 

생년월일 

비고 

부 

김재민 

 

 

모 

오명철 

???~1995년 2월 25일 

 

형 

김종철 

1920년 11월 7일~1986년 11월 4일 

6선 국회의원 

남동생 

김종환 

1930년 

재미실업인 

남동생 

김종식 

1935년 1월 10일~2009년 6월 21일 

전 국회의원 

여동생 

김종숙 

1941년 

김영일 전 한황에너지 부사장 배우자 

배우자 

강태영 

1927년~2016년 8월 11일 

 

장녀 

김영혜 

1948년 10월 16일 

전 제일화재해상보험 이사회 의장 

장남 

김승연 

1952년 2월 7일 

한화그룹 회장 

차남 

김호연 

1955년 4월 29일 

전 빙그레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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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정보

원산공립상업학교 졸(1941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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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정보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 입사(1942년)
한국화약 설립(1952년)
신한베어링공업(現 한화테크엠) 인수(1964년)
한국화성공업(現 한화케미칼) 설립(1965년)
태평물산 설립(1966년)
그리스 명예총영사(196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1967년)
재단법인 백암문화재단 설립(1968년)
경인에너지개발(現 SK인천석유화학) 설립(1969년)
대한사격연맹 부회장(1970년)
제삼석유 설립(1971년)
한국프라스틱공업(現 한화L&C) 설립(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1972년)
대일유업(現 빙그레) 인수(1973년)
태평건설 설립(1973년)
태평개발 설립(1973년)
김포요업 설립(1974년)
학교법인 천안북일학원 설립(1975년)
성운물산(現 SK인천석유화학) 설립(1975년)
서울플라자호텔 설립(1976년)
제일증권 설립(1976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1977년)
태평양엔지니어링 설립(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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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정보

동탑산업훈장(1970년)
그리스 금성십자대훈장(1972년)
은탑산업훈장(1973년)
철탑산업훈장(1974년)
금탑산업훈장(1981년)
제16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2009년)








[스페셜 인터뷰]‘소통 전도사’ 안만호 “공감하고 소통하라”
[KJtimes=견재수 기자]“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변화는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공감과 소통이 어려워진 것이다.(공감과 소통의) 의미가 사라지고 충동만 남게 됐다.” 한국청소년퍼실리테이터협회(KFA: Korea Facilitators Association)를 이끌고 있는 안만호 대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디지털 사회로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해 이 같이 진단했다. 또 이제 공감능력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면서 비대면 사회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소통 전문가로 통하는 안 대표는 “자신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스마트폰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사회성은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지식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며 “요즘 인간의 탈사회화가 진행되는 것에 비례해 인간성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코로나 사태는 사회적 거리를 두더라도 우리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이자 연대라는 점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졌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