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19

[릴레이인터뷰⑤]대구의료원 정명희 과장이 말하는 코로나19와 사투 170일간의 기록

<코로나19 이후의 삶> “병원 동료들, 함께 식사하는 모임이나 동호회 모임하지 않고 병원의 일상 업무 충실”

<KJtimes>코로나 19 이후의 삶이라는 특별기획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일상에서 공감과 교훈의 메시지를 찾고자 한다. 대구 신천지 발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를 직접 목도하고 생사의 갈림길에 선 코로나19 확진자들을 치료했던 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정명희 과장을 만나 재난 영화를 방불케 한 감염병과 사투를 벌였던 생생한 증언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일상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편집자 주>



[KJtimes TV=김상영 기자] “눈만 뜨면 구름처럼 불어나는 코로나 확진자에 솔직히 두려웠다. 재난 영화에 나올 법한 비극적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방호복을 입고 지퍼를 올리는 순간부터 숨이 턱턱 막혀왔다. 물자도 인력도 입원 시설도 모든 게 부족했다. 위기의 순간 대구시 의사회장이 올린 대구를 구하자는 호소문을 보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 역할을 할 의료진들이 대구로 달려왔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명희 과장은 대구 신천지 발 코로나 19 사태 직후 상황을 이같이 회고했다.


정 과장은 “560여 명의 대구의료원 직원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한마음이 되어 똘똘 뭉쳐 밤새워 일하며 맡겨진 업무에 최선을 다해 임했다지금 지역에서는 73일 이후 지역감염 확진자가 없지만 수도권의 발생을 보고 있으면 좌불안석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모두 나쁜 것만도, 100% 좋은 것만도 없는 것 같다아무리 험하고 힘든 상황이더라도 밝고 긍정적인 면을 찾으려 노력을 하다보면 한 줄기 가느다란 빛줄기가 숨어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지난 727일 인터뷰를 위해 찾은 대구의료원은 코로나 확진자 수백여 명이 입원 치료 받았던 병원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병원 입구부터 체온 검사와 소독이 철저하게 이뤄지고 있었고 병원 로비에는 전국 각지에서 의료진들을 응원하기 위해 보내온 각종 응원 메시지와 편지 등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어 이곳이 코로나와 사투를 벌였던 방역의 최일선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구의료원은 218‘31번째 확진자(신천지 신도)’가 입원하고 이틀 후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된 이후 현재(622일 기준)까지 837명의 환우가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그중 821명이 격리 해제되거나 퇴원했다.



대구의료원은 지난 71일 설립 106주년을 맞았다. 재난. 재해와 같은 위기로부터 누구보다 먼저 최일선에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의료안전망으로써의 기능을 수행해오고 있다.


다음은 정명희 과장과 일문일답


- 대구에서 신천지 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할 당시 의료인으로서 심정은 어땠나.

솔직히 두려웠다. 눈만 뜨면 불어나는 확진자 숫자에 기다리다가 사망하는 분들까지 생기니 겁이 났다. 몇 년 전 재난 영화 감기장면도 겹치고 그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그 확진자 발생한 상점, 병원들이 문을 닫으니 이것이 정말 현실이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대구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의료 인력과 병상이 부족해 많은 혼란이 있었는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한다면.


모든 게 부족했다. 물자도 인력도 입원 시설도 모두 턱없이 부족했다. 마스크도 고글도 심지어 장갑도 부족한 상황이라 한번 방호복을 벗고 나올 수가 없어서 시간을 넘겨 근무하기 일쑤였다. 간호사들은 머리가 터질 듯 아프면서도 동료를 위해 또 부족한 물자 때문에 나올 수가 없어서 쓰러지는 일까지 생겼다.


몸이 피곤하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보다도 물자 부족과 환자를 돌볼 인력과 병상이 부족한 것에 모두 너무 힘들고 지쳐갔다. 병실 부족으로 생활치료센터를 열었다. 그곳에서 경증환자를 돌보고 집에서 입원 못하고 머무는 수천 명을 전화로 상태를 확인했다. 그렇게 해도 입원 못 하고 있는 환자들을 전국의 병원으로 보내 치료받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218일 대구 첫 환자가 우리 의료원에 입원한 이후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방병원에 같이 입원한 환자들이 밀접 접촉자로 분류되어 코호트 격리를 위해 의료원을 비우기 시작했고 신천지 교인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하니 확진자가 구름처럼 불어났다.


대구 시장을 중심으로 의사회 임원들과 감염병 담당, 방역 담당자들이 대책반을 구성해 머리를 짜냈다. 대구의료원을 통째로 비워야 했다. 입원해 있던 환자들을 모두 퇴원시키고 코로나 전담으로서 역할을 맡았다. 이어 대구 동산병원도 코로나 전담 병원으로 나서게 됐다.


첫 환자가 발생 후 눈만 뜨면 코로나 확진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동선 공개도 역학조사도 역부족이라 그냥 확진자 숫자를 보면서 모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220일 청도대남병원 관련 확진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23일에는 정부의 감염병 위기 경보 최고 수준인 심각으로 상향됐다. 225일에는 신천지 신도 전체 코로나 전수조사가 시작됐다.


226일엔 국내 누적 확진자가 1146명으로 1000명대 진입하게 됐다. 보다 못한 대구시 의사회장이 호소문을 내었다. ‘단 한 푼의 대가도 바라지 말고 피와 땀과 눈물로 우리 대구를 구합시다. 지금 바로 선별진료소로 감염병 전담 병원으로 응급실로 달려와 주십시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 역할을 할 의료진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229일에는 대구에서만 741, 전체 확진자 909명이 되어 최대 규모로 증가했다. 누적 환자 1000명이 넘는 숫자에 모두 절망감이 일었다.”



-레벨 D 방호복을 입고 고글을 끼고 마스크를 쓰고 환자들을 돌보는 게 쉽지 않아 보이는데.


방호복을 입고 지퍼를 올리는 순간부터 몸 안에는 열기가 채이기 시작한다. 2월의 겨울 추위가 남아있는데도 방호복 안은 숨이 턱턱 막혀왔다. 거기다 N95 마스크를 쓰고 줄을 머리 뒤로 당기면 눈도 위로 치켜 지고 마구 당겨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 위에 고글을 걸치고 줄을 조이면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속 장갑을 끼고 그 위에 겉장갑을 하나 더 끼고 자판을 두드려 처방을 입력해야 하니 조금만 지나도 손에 땀이 주르르 묻어났다.


땀에 불은 손가락은 점차 부어올라 좁은 장갑 안에서 눌려 나중에는 마비가 될 정도로 감각이 둔해졌다. 오래 있으면 이것이 내 손인가 남의 손인가 싶다. 고글은 조금만 지나면 아무리 안티포그(antifog)를 바른 것이라도 앞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참으로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정도였다.”


-코로나19 확진자 사례들 중에서 가장 안타깝고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다면.


의사 동료이자 의과대학 동기인 고 허영구 원장이 코로나로 희생된 것이 너무 안타깝다. 졸업 후 본원에 인턴 순환 근무를 했던 근무표를 함께 근무한 동료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이름을 보면서 이 세상에 다시 볼 수 없는 그의 삶이 안타까웠다.


묵묵히 일하고 열심히 환자를 돌보았던 그가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가족의 얼굴도 다시는 대하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떠나게 됐고 임종도 장례식도 가족 아무도 지켜보지 못한 상태로 화장터로 떠났다고 생각하니.


정말 사는 것이 무엇인가,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49재를 한다고 보내온 그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잘 가라~’는 인사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내나 아들딸은 여느 때처럼 살아가겠지만 작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보낸 그의 지아비와 아버지에 대한 심정을 어찌 추스를까 싶다. 그 외 많은 지인들, 지인의 부모님들이 코로나로 고생하셨고 몇 분은 돌아가셨다. 자식된 도리도 다 못하는 그 심정이 어떨까 싶어서 참으로 안타깝고 허망했다.”


-지금도 선별 진료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나.


초기에는 24시간씩 돌아가면서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때 검사를 받으러 온 분들은 실내에 들어오기만 하면 오래 기다린 끝이라 이제는 살았다는 반가움이 일어서 그런지 자꾸만 마스크를 벗고 한숨을 쉬어대었다. 추위에 떨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으니 이제 검사를 하면 어찌 됐든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누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가졌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진찰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확진자 숫자도 줄어들어 근무교대 시간이 빨라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당번을 짜서 계속 근무하고 있다. 대구의료원은 지금은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 워킹 스루(Walking through) 형태로 바꾸어서 선별진료하고 있다. 방호복에서 벗어나니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다.”


-현재 대구의 코로나19 상황은 어떤가.


지역사회 감염은 7월 초의 지역감염 이후 아직은 발생하지 않았다. 동대구역의 워킹스루나 대구 공항의 검역과정에서 해외입국자들의 확진된 경우가 있다. 729일 현재 누적 확진자 6939, 완치 6835, 치료 중 13, 사망 187명이다. 전체 확진자수의 약 50%, 사망자는 전체대비 60% 넘는 숫자가 대구지역 환자였다. 초기 병실이 부족해 입원 못하고 있었던 고령의 환자, 기저질환자들의 희생이 많아 정말 안타깝다.”


-올 가을쯤 코로나19 2차 대유행이 예고되고 있는데 또 다시 올해 초와 같은 코로나 19 사태가 재현된다면 두렵지 않나.


6개월이 지나면서 코로나에 대한 지식도 쌓이고 이제는 병실순환이나 대비책들이 그 나름으로는 준비가 되고 있는 듯해서 초기의 혼란은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갑자기 쓰나미처럼 다시 (코로나 확진자들이) 몰려온다면 당황스럽고 두려울 것 같다.


나쁜 일을 겪고 나면 경험이라 하고 좋은 것은 겪고 나면 추억이라고 한다고 하지 않나. 아무리 나쁜 경험이라도 잘 이겨내고 나면 우리에게 무언가 남을 것 같다. 코로나에 비싼 학습비용을 지불했으니 그의 효과를 기대해보면서 다시 위기가 닥치더라도 의연히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19 이후 일상은 어떻게 달라졌나.


병원 생활은 (대구의료원이) 코로나 전담 병원이 되다 보니 예전에 다니던 환자들이 아직 다 돌아오지는 않고 있다. 입원 환자도 줄었고 외래 진료도 확실히 숫자가 줄었다. 전화로 문의가 많다. 지금 가서 진료 받아도 되느냐고 말이다.


택시를 탔더니 기사분이 코로나 전담 대구의료원 의료진들 힘내세요~, 당신들을 응원합니다. 덕분에~!’라는 현수막이 의료원 근처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택시 승객이 조금 열려있던 창문을 갑자기 올리더니 마스크를 단단히 조여 매더라고 이야기를 전해줬다.


코로나 전담병원의 이미지가 남아서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듯하다. 병원 동료들도 함께 식사 모임이나 동호회 모임하지 않고 단순히 병원의 일상 업무를 충실히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병원과 집을 출퇴근하면서 동선을 될 수 있으면 단순화하려고 한다. 하루의 생활은 물론이고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일정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대신에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실천하고 있다. 하루 만 보 걷기에 도전해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자주 얼굴을 대하지는 못하지만 전화로 카톡으로 또 엽서로 보고 싶은 이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만남은 랜선 나들이를 하면서 조용하고 알찬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도 꺼내 읽고 장롱 정리도 하고 있다. 장롱에서 아파트 입주할 때 샀던 채권이 나왔다. 그동안 친정아버지가 늘 정리해주셨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이제야 문서함을 열어보았더니 유효기간이 다 지나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하나씩 주변을 돌아보며 정리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다.”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료 의료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의료진이 최종 방어선이라는 생각으로 있는 힘을 다해 버티었을 것 같다. 너무 지치지 말고 가끔은 머리를 비우고 마음도 챙겨서 자신을 돌보시기를 바란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모두 힘을 합쳐서 나가다 보면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아무리 어둡고 긴 터널이라도.”









[스페셜 인터뷰]‘소통 전도사’ 안만호 “공감하고 소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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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7년 6월 유아용 매트를 사용하던 아이가 잔기침을 하고 두드러기가 생겼다는 글이 인터넷 맘카페를 통해 확산되면서 대한민국 엄마들의 공분을 샀던 일이 있었다. 바로 ‘보니코리아의 아웃라스트 사태(이하 보니 사태)’다. 당시 한국기술표준원(www.kats.go.kr)은 유해성 논란이 불거지자 ‘리콜’을 권고했다. 하지만 보니코리아 홍성우 대표는 ‘재고 소진 후 환불하겠다’는 대응을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유해성 의혹을 받고 있는 제품을 끝까지 팔아치우려는 비양심적 기업이라는 비난이 들불처럼 번진 탓이다. 결국 소비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에 홍 대표는 ‘제품의 환불 및 리콜과 관련해 법적 절차에 따라 모두 처리할테니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홍 대표의 사과 이후 4년째, 기회를 달라던 홍 대표와 그의 환불 약속은 세월과 함께 종적을 감췄다. <kjtimes>는 월매출 수십억원을 올리며 급성장하던 회사가 보니 사태 직후 선량한 소비자들을 왜 피해자 상태로 방치하게 됐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그리고 종적을 감췄던 홍성우 전 대표와 최근 혜성처럼 나타난 유아용품 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