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Jtimes=정소영 기자] 이재명 정부의 전력 정책이 기로에 섰다.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가스발전소를 늘릴 것인가, 아니면 태양광, 전기차 등 분산된 자원을 통합 관리하는 가상발전소(Virtual Power Plant, VPP)를 적극 육성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로 떠오르면서 한국 전력시장이 중대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 이후 ‘한국형 차세대 전력망 전략’을 발표하며 VPP 확대를 정책 과제로 제시했지만, 여전히 가스발전소 중심의 중앙집중형 체계가 유지되고 있다. 반면 미국, 유럽, 호주 등 해외에서는 이미 수십 GW 규모의 VPP를 가동하며 전력 피크 대응과 탄소배출 감축을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공개된 글로벌 보고서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VPP 확대 가능성과 정책 전환 필요성을 짚고 있어 주목된다.
국제 기후환경 단체인 기후솔루션은 지난달 28일 발표한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시스템으로의 전환: 가스발전소에서 기상발전소로’ 보고서를 통해 VPP 확대야말로 탄소중립과 전력 효율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역시 2050년 탄소중립 시나리오에서 전체 전력 유연성의 절반 이상을 에너지저장장치(ESS, 전기를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는 대형 배터리)와 수요반응자원(DR, 전력 피크 시기에 공장이 작업 시간을 조정해 전기사용량을 줄이는 것과 같이 전기 사용자가 수요에 맞춰서 사용량을 변화시키는 행위)이 담당할 것으로 전망했으며 이를 연결·운영하는 VPP가 핵심 축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 해외는 이미 'VPP 시대', 한국은 왜 걸음마 수준?
기후솔루션 보고서에 따르면 가상발전소는 태양광 패널, 풍력 터빈, 전기차 배터리, ESS 등 소규모 분산형 전력 자원들을 ICT 기술로 통합해 하나의 발전소처럼 운영하는 지능형 시스템으로, 전력 피크 시간대에 소비자의 전기 사용량을 줄이거나(DR), 전기차 배터리의 전기를 다시 전력망으로 보내는(V2G) 등 유연하게 전력을 관리할 수 있어 전력망 안정화에 큰 도움이 된다.

보고서는 “이미 해외에서는 VPP가 전력 시스템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현재 30GW 규모의 VPP를 가동 중이며, 2030년까지 160GW로 확대해 전체 전력 피크의 20%를 담당하게 할 계획이다”며 “테슬라, 옥토퍼스 에너지 등 글로벌 기업들은 VPP를 통해 전력난 해소와 탄소 감축을 동시에 이루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중앙집중형 발전 시스템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제주도에서 약 200MW 규모의 VPP 기반이 마련되고 있지만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전력거래소 시장에서 VPP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기차 배터리를 전력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조차 제도적 장벽에 부딪혀 있다. 이러한 규제와 보상 체계의 미비가 VPP 확산을 가로막는 주된 이유라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 경제성·속도·탄소감축…VPP의 압도적 경쟁력
기후솔루션 보고서에 따르면 같은 400MW 전력을 확보하는 데 VPP는 43달러/kW로 신규 가스발전소(99달러/kW)보다 절반 이하의 비용으로 가능하며 수개월 내 구축이 가능해 수년이 걸리는 가스발전소보다 훨씬 신속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경우 ‘자원 적정성 프로그램’을 통해 필요한 전력자원을 시장 경쟁으로 조달하고 있으며, 호주는 ‘초속응성 주파수 조정 시장’을 신설해 VPP 자원에 별도 보상을 제공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연료비 중심의 시장 구조로 인해 연료비가 없는 VPP의 가치가 공정하게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보고서는 “한국의 VPP 확산은 제도적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수요반응자원(DR)은 별도 시장에서 운영돼 VPP와 통합되지 못하며 전기차는 산업통상자원부 고시에 따라 소규모 자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전국에 40만기 이상의 전기차 충전기가 있지만 대부분 단방향(충전만 가능)이며, 다시 빼내어 전력망에 공급하는 양방향 충전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전이 설치한 스마트 계량기(AMI)도 구형 설비가 많아 실시간 데이터 수집에 한계가 있다. 독립적인 배전망운영자(DSO) 부재 역시 제도적 기반 마련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전문가 제언…“기술은 준비됐지만, 제도가 막고 있다”
보고서는 ▲가스발전 확대 정책 중단 ▲VPP 자원의 가치를 반영하는 시장 보상체계 개편 ▲양방향 충전기 및 고도화된 계량기 보급 ▲독립적 DSO 설립을 제안했다.
보고서의 저자인 임장혁 기후솔루션 연구원은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서는 더 이상 중앙 집중형 화력발전소를 확대할 수 없다”며 “뛰어난 AI 및 배터리 기술 기반을 갖춘 한국이야말로 가상발전소 확대를 통해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췄지만 규제로 인해 막혀 있어 시장이 조성되고 규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