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times=장우호 기자]대법원이 일제에서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는 9일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이 낸 친일반민족행위자지정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해승은 1910년 10월 일제로부터 받은 후작 작위를 광복될 때까지 유지했다. 또 1911년 1월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16만8000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어 1937년 조선총독부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평의원을 지냈다. 이 조직이 확대개편된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도 평의원을 맡았다. 이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7년 11월 이해승을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로 선정하고, 2009년 5월 이해승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1심 재판부는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 것은 정당하다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당시 20세 남짓인 이해승이 한일합병에 기여했음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한일합병의 공으로 후작 작위를 받았다고 보기 어
[KJtimes=김봄내 기자]롯데그룹 신동주·신동빈 친형제간 갈등이 대기업 그룹 집단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눈꼴사나운 전근대적인 재벌경영 행태라는 비판을 도출시키고 있다.예컨대 그룹 지배권을 둘러싸고 빚어지고 있는 부자·친형제·친족간 진흙탕 싸움, 창업주의 독단적인 황제경영, 불투명하게 장막에 쌓여있는 기업 지배구조 등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줄줄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2일 재계에 따르면 ‘유통재벌’로 통하는 롯데그룹의 재계 서열은 5위다. 연매출 83조원에 임직원 10만명, 80여개의 계열사를 갖고 있는 대기업 그룹 집단이다. 하지만 민낯을 드러내고 있는 그룹의 실상은 눈꼴사나울 정도다. 때문에 재계 일각에선 전근대적인 재벌경영 행태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부자·친형제·친족간 진흙탕 싸움우선 그룹 후계자 자리를 놓고 부자·친형제
[KJtimes=김봄내 기자]정몽준 전 의원(현대중공업 대주주)의 장남 정기선 경영기획팀 수석부장이 후계자의 꼬리표를 떼고 신세대 경영인에 합류했다. 수석부장에서 상무로 승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세간에선 벌써부터 정 상무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세간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본격적 3세 경영’과 ‘오너경영’ 시작 여부다. 아울러 정 상무의 경영능력도 관심사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분위기다. 정 상무는 1982년생으로 정몽준 전 의원과 김영명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 여사는 미국 웨슬리대학 출신의 재원이었으며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막내딸이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2남2녀를 두고 있는데 장녀 정남이씨와 차녀 정선이씨, 그리고 차남 정예선군이 그들이다. 대일외국어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학군(ROTC) 43기로 임관해 육군 장교로 복무한…
[KJtimes=김봄내 기자]신격호 총괄회장의 지계 혼맥은 단촐함 그 자체다. 그러나 방계혼맥을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9명이나 되는 동생들과 수많은 조카들의 혼맥을 통해 정•재계의 고위층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혼맥망을 그려내고 있어서다. 첫째 남동생인 고 신철호 전 동인 회장은 평범한 집안 출신인 송수영 여사와 결혼해 2남6녀를 뒀다. 그리고 법조계와 혼맥을 구축했다. 장남인 신동림씨는 정승원 서울가정법원 판사와 결혼했다. 정 판사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이혼소송을 담당해 화제를 낳았던 인물이다.장녀인 신혜향 여사는 조용완 전 서울고등법원장에게 시집을 갔고, 3녀인 신미진 여사는 장태규 변호사와 혼인했다. 또 5녀인 신지은 여사는 정경연 변호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둘째 남동생인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은 사돈 관계가 화려하다. 신춘
[KJtimes=김봄내 기자]‘롯데가문’하면 연상되는 인물이 있다. 신격호 총괄회장이다. 그는 올해 92세의 나이임에도 아직 건재하다. 올 1월 신년사를 통해 임직원들에게 ▲과감한 혁신과 현장 중심경영을 통한 기존사업의 내실화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한 품질 경영 ▲해외외사업의 지속적인 확장과 안정적 성장 등을 강조하며 존재감을 확인시켰을 정도다. 롯데가문의 가장 큰 특징은 직계 혼맥은 ‘단촐’하다는 것이다. 반면 방계 혼맥은 ‘화려함’ 그 자체다. 신 총괄회장은 세 명의 부인을 거느리며 이들 사이에 2남2녀의 자녀를 뒀다. 그가 첫 번째 결혼을 한 것은 그의 나이 19세 때였던 1939년의 일이다. 배우자는 같은 마을에 살던 노순화 여사였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결혼생활은 길지 못해 1년여 만에 끝났다. 결혼 당시 울산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종축기사를 일하
[KJtimes=김봄내 기자]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가문에는 기억하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다. LG가의 아픔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장남인 구원모씨를 10대의 나이에 하늘로 보낸 일이다. 구원모씨는 지난 1990년대 중반 고등학생 때 불의의 사고(급사)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는 구 회장 부부의 가슴에 커다란 못으로 남아 있다. 외아들 사망 이후 다시 아들을 얻기 위한 구 회장 부부의 노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구원모씨가 생존해 있다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나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등과 같이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을 것이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았던 구 회장이 독실한 불교신자로 알려진 부인 김영식 여사를 따라 한동안 서울 삼청동 칠보사를 유난히 찾았던 것도 아들 구원모에 의해서다. 구 회장은 아들
[KJtimes=김봄내 기자]고 구인회 창업주의 특별한 인연을 꼽는다면 사돈인 고 홍재선 전 금성방직 전무다. 이들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었다. 그러다가 서로 사돈을 맺기로 합의하고 구 창업주의 차남 구자승 전 LG상사 사장과 홍 전 전무의 딸 홍승해 여사와 결혼을 시켰다. 이후 구 창업주와 홍 전 전무는 평생을 사돈으로, 친구로, 재계의 동지로서 동고동락을 같이 했다. 특히 구 창업주의 4남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과 4녀 구자순 여사의 혼사에 중매를 함으로써 LG가의 한축을 형성했다.또 다른 특별한 인연으로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있다. 이들의 만남은 진주 지수보통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구 창업주는 이 학교에 편입했는데 그 때 이 창업주를 만났다. 이들 창업주는 이를 인연으로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이 같은 교분은 서로 사업을…
[KJtimes=김봄내 기자]LG가문이 ‘재계 혼맥의 본산’이 된 가장 주된 이유 중 하나를 꼽는다면 LG의 여러 가계가 하나같이 ‘다손’ 집안이라는 것이다. 실제 고 구인회 창업주는 10남매를 뒀다. 그의 장남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6남매의 자녀가 있다. 이렇듯 구 창업주의 아들 6형제의 직계자녀만 22명이 된다. 그러니 그의 형제(6형제)들의 손자대의 자손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자손이 많다는 것은 혼사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혼사는 LG가의 통혼관과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재계 혼맥의 본산을 일궈낸 것이다.구 창업주는 5명의 남동생을 뒀다. 철회•정회•태회•평회•두회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자녀만 29명에 달한다. 이들 조카의 혼사는 다양한 통혼의 결정적 힘이 됐는데 동생들의 집안 혼사로 인해 전직 대통령과 사돈관계를 따질 수 있게
[KJtimes=김봄내 기자]LG(구 럭키금성)그룹은 재계 혼맥의 본산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모든 재계 혼맥은 LG로 통한다. 이 같은 혼맥 형성은 고 구인회 창업주가 자녀들을 출가시키면서 재력가 또는 명문가를 찾아 사돈을 맺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실제 구 창업주의 사돈으로는 홍재선 전 전경련 회장, 이병철 삼성 창업주, 이홍배 변호사, 이규덕 대림산업 창업주, 이보형 전 제일은행장, 류헌열 전 대전지방법원장 등이 운집해 있다. 때문에 재계 일각에선 구 창업주의 통혼행태에 대해 ‘통혼을 경영하듯 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무엇보다 LG가의 혼사 특징을 꼽는다면 전통적인 가풍이 엄격한 탓인지 거의가 중매결혼을 했다는 점이다. 구 창업주는 천석꾼 고 허만식씨의 장녀 허을수 여사와 14세 되는 해 결혼을 했다. 허 여사는 그보다 두 살이 많았다. 이들은 슬하
[KJtimes=김봄내 기자]고 정주영 창업주의 진면목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이미지와 얼굴을 보여줬던 탓이다. 불도저같은 저돌성으로 독특한 경영인의 모습을 보여줬는가 하면 수많은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한 주인공이기도 하다.하지만 무엇보다 정 창업주를 얘기하는데 있어 ‘반역’이란 단어를 빼놓을 수는 없다. ‘현대’의 탄생에서부터가 부친에 대한 끝없는 반역으로 시작했으니 말이다.정 창업주는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전국에서 가장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6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이곳에서 서당공부와 신문대학을 통해 전문가 버금가는 한문 실력은 물론 폭넓은 식견을 갖췄다.그러던 그가 반역을 시작한 것은 15살 되던 해부터였다. 이 때부터 3년간 4번의 가출을 시도했다. 그
[KJtimes=김봄내 기자]한국경제 발전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일가에선 파란만장한 가족사도 빼놓을 수 없다. 재계 일각에선 현대가 잇따른 ‘비운’과 경영난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다. 지난 1938년 경일상회라는 쌀가게로 출발, 국내 최대 대기업 집단인 현대그룹을 창업하는 신화를 만들었던 정 창업주는 6명의 형제와 슬하에 8남1녀의 자녀, 30명에 달하는 손자손녀를 둔 다복한 대가족의 가장이기도 했지만 형제와 자식들을 먼저 앞세운 불운을 맞았다. 정 창업주의 아들 가운데 사고로 숨지거나 자살한 사람은 4명에 이른다. 여기에다 동생까지 3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또 첫째 며느리 역시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정 창업주는 이들 중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을 제외
[KJtimes=김봄내 기자]한국 기업의 발전과 관련된 숱한 신화의 주역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한국 경제의 ‘영원한 보스’였던 그는 자기 발(운동화 300mm)만큼이나 큰 족적을 남긴 거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 그에게 특별한 인연이 된 인물들은 누구일까. 우선 정 창업주의 여동생 남편인 고 김영주 한국프랜지 전 명예회장(2010년 8월 11일 별세)을 꼽을 수 있다. 김 명예회장은 정 창업주의 창업 동기다. 현대그룹의 또 다른 산증인이기도 하다. 이들의 인연은 194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 창업주는 홀동광산에서 운수업을 하고 있었고 김 명예회장은 인기직종이던 운전기사로 일했다. 그러던 중 둘이 만나 뜻을 같이했고 한가족(매제)까지 됐다. 그는 ‘기계박사’로 통했는데 중공업 분야에서 우뚝 선 오늘의 현대그룹을 일군 인물이다. 뿐만 아니다. 정…
[KJtimes=김봄내 기자]현대가문 혼사의 가장 큰 특징을 꼽는다면 단연 ‘연애결혼’이다. 고 변중석 여사와의 사이에 8남1녀를 둔 고 정주영 창업주는 모두를 자유결혼을 시켜 거의 대부분 평범한 인물들과 사돈을 맺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권문세가와 혼사를 맺을 수 있었지만 정략결혼보다는 자식들의 의사를 존중했다. 사실 정 창업주는 보기 드문 연애결혼 찬미자다. 그 역시 집안결정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평범한 농가 출신인 변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정 창업주는 평소 ‘결혼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에 물질과 정략이 개입되어선 안된다. 결혼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어야 한다’는 결혼관을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자녀들은 모두 연애결혼으로 가정을 꾸렸다. 정 창업주는 국내 재벌기업들의 창업사에서 발견하기 힘든 가정과 가족의…
[KJtimes=김봄내 기자]삼성가문에는 비운의 주인공이 두 명 있다. 모두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이다. 그 첫 번째는 고 이병철 창업주의 둘째 아들 고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이다. 1933년 5월 24일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그는 1991년 7월 19일 불치의 병으로 생을 달리했다. 이 창업주가 1987년 11월 19일 타계했으니 불과 4년 만에 부친을 따라간 셈이다.이 전 회장은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이다. 그는 유학시절 만난 나카네 히로미(개명 후 이영자) 여사와 1963년 결혼했다. 그리고는 슬하에 3남1녀를 뒀다.이 여사는 일본 아이치현 출신으로 일본 미츠이물산에서 중역으로 일했던 나카네 쇼지의 딸이다. 일본 이름을 버리고 ‘이영자’란 이름으로 개명한 것은 결혼 23년 만인 1986년의 일이다. 이 전 회장은 한 때 이 창업주에게 ‘촉망받는 아들’로 사랑을 받았으나 이른바 ‘
[KJtimes=김봄내 기자]청과물 판매상에서 오늘의 세계적 삼성그룹을 키운 고 이병철 창업주. ‘신뢰’를 경영철학으로 삼았던 그는 천부적인 투시력과 재능을 가진 사업가이자 우수한 정보수집가였다. 게다가 자신의 뜻을 반드시 실현시키고 마는 용병의 달인이기도 했다. 이 같은 요소들이 오늘날의 삼성그룹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기업을 일으키고 가장 많은 부를 쌓았음에도 그의 사업과 인생행로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군 사업체를 타의에 의해 가장 많이 빼앗긴(?) 인물 중 한 명이다.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반면 때로는 정변으로 인한 극심한 사회변동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던 것이다. 이 창업주가 사업을 하면서 첫 번째 아픔을 겪은 것은 6•25 때였다. 해방 후 서울에서 번창했던 사업들이 전쟁으로 인해 헛되이 수고한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