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이정재가 군사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후계자인 유지광마저 정치깡패 혐의로 구속되면서 김두한의 ‘종로파’, 이화룡의 ‘명동사단’과 함께 ‘동대문사단’을 이끈 실질적 보스가 됐다. 싸움실력도 대단했다. 유도와 태권도 유단자라는 무술실력. 체중이 실린 ‘원펀치’로 유명했던 그는 175㎝의 키에다 서울대 상대(52학번) 출신의 '인텔리 주목'이었다.
귀공자 풍의 외모로 여성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김씨는 1961년 5·16 혁명직후 정치깡패로 몰려 군사재판 법정에 서기도 했다. 김씨는 석방후 박정희 군사정부로부터 전라북도 군산시장과 전국구 국회의원까지 제안 받았으나 “군사정권에 협력하기 싫다. 쿠데타 정권을 도우며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은 협객의 길과 다르다”며 거부한 일화 또한 유명하다. 이때 그가 진술한 내용은 주먹세계에서 어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절대 깡패가 아니다. 협객이다. 법을 어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약한 사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을 향해서만 주먹을 날렸다. 사람에 따라 내가 걸어온 길을 비난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 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협객의 길을 걸어왔음을 자부한다. 다시 태어나도 협객의 길을 걷겠다.”
이후 주먹계에서 은퇴한 김씨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선행을 베풀었다. 그는 양로원과 고아원을 돌면서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노후를 바쳤다. 한 후배는 “누구보다 애국심이 강했고 남을 돕는 일도 자신의 공적을 알리기보다는 묵묵히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닌 큰형님이 주먹들 사이에선 협객의 표본이 되고 있어 후배들도 뜻을 받들고자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