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times=이지훈 기자]김정식 대덕전자 회장이 11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김 회장이 1965년 설립한 대덕전자는 흑백 TV 인쇄회로기판(PCB) 부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해 TV를 넘어 PC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부품까지 생산영역을 확대했다. 현재는 스마트폰과 5G 이동통신 등에 필요한 PCB를 주로 생산하고 있다. 현재 대덕전자의 규모는 지난해 기준 매출 9천600억원에 직원 2천여명을 거느리는 기업으로 성장한 상태다. 국내 전자산업 발전에 대한 김 회장의 애정과 관심은 마지막까지 뜨거웠다. 지난 1991년에는 사재를 들여 해동과학문화재단을 설립해 이공계 연구자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고, 2002년에는 대덕복지재단을 세워 사회공헌 사업도 활발히 해왔다. 또 올해 2월에는 모교인 서울대에 4차 산업시대에 걸맞은 교육을 위한 'AI(인공지능) 센터' 설립에 써달라며, 사재 500억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김 회장의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오는 15일로 예정됐다.…
[KJtimes=장우호 기자]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1952년 2월 7일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故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와 故 강태영 여사 사이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다가 196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74년 멘로대학교에서 경영학 학사학위를 받고 1976년 드폴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전두환 정권 때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서정화 자유한국당 상임고문의 장녀 서영민씨와 결혼했다. 1977년 태평양건설 해외수주담당 이사로 입사했고 이듬해 사장에 올랐다. 1981년 갑작스런 부친의 사망으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화약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1982년 한양화학(現 한화케미칼), 한국다우케미칼을 인수하면서 석유화학 사업에 진출했다. 1983년 경인에너지(現 SK인천석유화학) 내국화를 단행했다. 1985년 정아그룹(現 한화호텔&리조트), 1986년 한양유통(現 한화갤러리아)을 인수하면서 3차산업에 진출했다. 1990년 경향신문사를 인수한 뒤 1992년부터 경향신문사 회장을 지냈다. 해외 진출을 추진하며 1993년 아테네은행, 1996년 헝가리 엥도수에즈 부다페스트은행(現 헝가리 한화은행) 등
[KJtimes=장우호 기자]故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는 192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故 김재민씨와 故 오명철 여사의 4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천안북일사립학교와 직산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경기공립학교에 입학한 뒤 원산공립상업학교로 편입해 1941년 졸업했다. 사업을 한창 크게 키우던 1970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형인 故 김종철 전 국민당 총재가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배우자 故 강태영 여사와의 인연이 이뤄졌다. 양가는 이미 집안 간 혼인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장남이 결혼을 미루자 부친이 차남인 김 차업주에게 혼인을 강요한 것이다. 1942년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하면서 화약과 첫 인연을 맺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떠나자 지배인 자격으로 이 회사를 인수해 미 군정청 등으로 판로를 개척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조선화약공판을 인수할 새로운 회사법인이 필요해짐에 따라 1952년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53년 서울 회현동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1956년 인천화약공장을 복구해 1957년 다이너마이트 원료로 쓰이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생산, 1958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
[KJtimes=장우호 기자]박지원 두산중공업 회장은 1965년 4월 20일 서울특별시에서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과 故 이응숙 여사 사이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84년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88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나왔다. 1990년 뉴욕대학교 MBA 과정을 수료했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 미학과 출신의 서지원씨와 결혼했다. 1988년 동양맥주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가 1992년 글로벌 광고기획사 맥켄에릭슨에 입사해 도쿄지사와 뉴욕 본사에서 근무했다. 1993년 두산그룹으로 돌아와 4년간 두산아메리카에서 근무했다. 1997년 두산상사 이사, 1999년 두산 상무를 역임했다. 2001년 두산중공업으로 자리를 옮겨 기획조정실장 부사장을 맡은 뒤 2007년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2009년 두산 사장, 2012년 두산 부회장,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한 뒤 2016년 형 박정원이 두산그룹 회장에 오르자 두산그룹 부회장에 올랐고,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회장을 함께 겸임하고 있다. 두산그룹은 2000년 말 민영화된 한국중공업을 인수해 두산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침체된 직원들의 사기를 끌
[KJtimes=장우호 기자]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1962년 3월 9일 서울에서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과 故 이응숙 여사 사이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81년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85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1989년 보스턴대학교 MBA과정을 수료했다. 17대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故 김인기 전 국회의원의 딸 김소영씨와 결혼했다. 부친 박용곤 명예회장과 김 전 의원은 경동고 선후배 사이로 동창회 모임에서 두 사람의 혼담이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1985년 두산산업에 입사해 1990년 두산산업 뉴욕지사와 동경지사 등 해외에서 근무했다. 1992년 동양맥주에서 과장으로 있었고 1993년 부장, 1994년 이사, 1997년 상무에 올랐다. 1998년 두산으로 자리를 옮겨 관리본부에서 상무로 근무했다. 1999년 관리본부 총괄 전무에 올랐다가 같은 해 두산 상사BG 대표이사 부사장에 올랐다. 2001년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2005년 두산산업개발 부회장, 2007년 두산 부회장, 2009년 두산건설 회장, 두산베어스 구단주를 거쳐 2012년 두산 회장에 올랐고 2016년부터 숙부인 박용만 전 회장으로부터
[KJtimes=장우호 기자]박용현 중앙대학교 이사장은 1943년 9월 16일 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과 故 명계춘 여사 사이 6남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1962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8년 서울대학교에서 의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외과학 석사, 1977년 외과학 박사학위를 땄다. 1968년 이화여자대학교 음대를 나온 故 엄명자 여사와 혼인했다. 2003년 엄 여사가 지병으로 별세하자 홀로 지내다가 2009년 동문이자 20세 연하 의사 윤보영씨와 재혼했다. 둘은 서울대 의대 동문회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양천구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윤씨는 결혼 2년 뒤 내조에 전념하기 위해 의사생활을 그만 뒀다. 197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1978년 조교수에 오른 뒤 1983년 부교수를 거쳐 교수에 올랐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브리검&위먼스병원에서 전임의로 근무한 이력도 있다. 하버드대 의대에 몸담을 당시 담석에 관한 연구를 시작해 귀국 후에도 20여년간 담석 치료를 위해 한우물을 팠다. 1993년 서울대병원 기획조정실 실장, 1995년 진료부원장을 지낸 뒤 1998년 제
[KJtimes=장우호 기자]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1932년 4월 17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부, 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과 故 명계춘 전 두산산업 감사 사이 6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9년 워싱턴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결혼은 여동생 박용언씨의 친구 故 이응숙씨와 했다. 이씨는 박두병 초대회장이 며느리감으로 마음에 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한국산업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63년 동양맥주에 입사해 경영에 참여한 뒤 1966년 한양식품 사장, 1973년 동양맥주 부사장에 올랐고 1974년 합동통신과 두산산업 사장에 취임했다. 1978년에는 두산산업 회장이 됐다. 1981년부터 두산그룹 회장을 맡다가 1991년 이른바 낙동강 페놀사건으로 인해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1993년 두산그룹 회장에 복직한 뒤 1996년부터 현재까지 명예회장으로 있다. 대외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4년 한국신문협회 이사, 국제언론인협회 회원을 지냈고 1981년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국제상업회의소 의장을 맡았다. 1983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1988년 현
[KJtimes=장우호 기자]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은 1955년 2월 5일 서울특별시에서 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과 故 명계춘 전 두산산업 감사 사이 6남1녀 중 5남으로 태어났다. 1973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나왔다. 그해에 강성진 BNG증권 회장의 장녀 강신애씨와 결혼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82년 보스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외환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83년 두산건설 뉴욕지사에서 근무했다. 두산음료에서 1990년 이사, 1994년 전무를 맡았다. 1995년 두산동아 부사장,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장 부사장을 거쳐 1996년 OB맥주 부사장을 역임했다. 2005년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두산그룹에서 부회장에 올랐다가 故 박용오 전 성지건설 회장이 형제의난을 일으키자 모든 직함을 내려놨다가 2007년 특별사면으로 복권된 뒤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으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2009년 오리콤 회장, 두산건설 회장, 두산중공업 회장을 겸임했다. 형 박용현 중앙대학교 이사장에 이어 2012년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해 4년간 두산그룹을 이끌었다. 201
[KJtimes=장우호 기자]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은 1940년 9월 11일 일제 강점 하의 경성부, 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과 故 명계춘 전 두산산업 감사의 6남1녀 가운데 삼남으로 태어났다. 1959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대에 진학하려 했으나 부친 박두병 초대회장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상대에 진학해 1965년 졸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두산가(家) 3세 가운데 가장 먼저 MBA 학위를 취득했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불문과를 나온 김선필 전 삼성물산 사장의 딸 김영희씨와 혼례를 올렸다. 한국투자금융과 한양투자금융 등에서 금융 업무를 익힌 뒤 1974년 두산식품 전무로 그룹 일에 참여했다. 1984년 동양맥주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1993년 두산그룹 부회장, 1994년 오비맥주 대표이사 회장을 지낸 뒤 2001년 한국중공업이 두산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했다. 2005년 두산인프라코어의 대표이사 회장이 되면서 두산 주요 계열사를 두루 거쳤다. 2007년 두산중공업에 복귀해 2015년 중앙대학교에서 물의를 일으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기…
[KJtimes=장우호 기자]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은 1950년 6월 12일 서울특별시에서 故 홍두영 남양유업 창업주와 지송죽 남양유업 전 감사 사이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7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재학 중이던 1976년 故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주의 장녀 이운경씨와 결혼했다. 1974년 남양유업 기획실 부장으로 입사해 경영을 틈틈이 도왔다. 1977년 이사로 승진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했다. 1979년 상무, 1980년 전무, 1988년 부사장을 지낸 뒤 1990년 4월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2003년부터 남양유업 회장을 맡고 있다. 남양유업은 창업주 홍두영 명예회장이 1964년 자신의 본관인 남양 홍씨에서 사명을 따 설립한 기업이다. 홍 명예회장은 한국 낙농업계의 대부로 평가받는다. 故 김복용 매일유업 창업주와 비슷한 나이, 이북 출신, 짠돌이 경영 등 유사한 점이 많아 비교대상이 됐다. 두 회사가 취급하는 제품군과 매출액도 비슷했다. 홍 명예회장은 1954년 설립한 남양상사가 1962년 화폐개혁으로 순식간에 바닥에 주저앉자 극단적인 보수 경영을 실시하고 홍원식 회장의 경영수업을 일찍 시작했
[KJtimes=장우호 기자]故 박용오 전 성지건설 회장은 1937년 4월 29일 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과 故 명계춘 전 두산산업 감사 사이 6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5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뉴욕대학교에서 상학을 전공했다. 뉴욕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62년 미국에서 만난 故 최금숙씨와 혼인했다.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뒤 1965년 두산산업에 입사해 1974년 전무이사를 달았다. 같은 해에 동양맥주 전무이사에도 올랐다. 1977년 두산산업 부사장, 1993년 두산상사 회장을 거쳐 1996년 맏형인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2005년 두산가 ‘형제의 난’을 계기로 두산그룹 회장직을 내려놓고 명예회장이 됐다. 명예회장에는 올랐지만 사실상 제명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008년 성지건설을 인수하고 회장에 올랐다. 그룹을 경영하면서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다. 19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 올랐다. 1983년 OB베어스 구단주로 있었고, 1998년 KBO 제12대 총재로 올라 제14대 총재까지 연임했다.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공격적인 경영으로 그룹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KJtimes=장우호 기자]신동원 농심그룹 부회장은 1958년 1월 9일 부산에서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과 김낙양 여사 사이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인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과는 일란성 쌍둥이다. 장남 신동원 농심 대표이사 부회장은 동생인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보다 10분 일찍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다.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를 나왔다. 1986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나온 민선영씨와 중매로 만나 두달 반만에 결혼했다. 민씨는 민철호 전 동양창업투자 사장의 장녀다. 1976년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9년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를 학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무역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교 졸업 후 1979년 농심에 사원으로 입사했다. 1994년 농심 전무이사에 올랐다. 1996년 농심 부사장과 농심기획 대표이사 사장을 겸임했다. 1997년 농심 국제담당 대표이사 사장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농심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있으며 2010년부터는 농심홀딩스 대표이사 사장도 겸임하고 있다. 2011년 팔도가 꼬꼬면을 출시하자 국내에 하얀국물 열풍이 불었다. 당시 삼양은 나가사키짬뽕, 오뚜기는 기스면을 출시하며 잇따라 하얀국물 라면을 출
[KJtimes=장우호 기자]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은 1910년 10월 6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부, 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보부상 출신의 거상 故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와 故 정정숙 여사 사이 4남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딸만 낳던 집안에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 가족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 동대문심상소학교와 경성중학교를 거쳐 경성고등상업학교(해방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1년 서울 서린동에서 저포전을 경영하던 명태순씨의 딸 명계춘씨와 결혼했다. 1932년 경성고상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행했다. 1936년 부친이 운영하는 두산그룹의 전신 ‘박승직상점'에 상무이사로 입사해 경영에 참여했다. 당시 근대적 경영방식인 출근부제도와 보너스제도를 도입했다. 1940년대 일본의 전시 통제로 박승직상점 경영이 어려워지자 미쓰비시 그룹이 운영하던 기린맥주 조선지부 대리점을 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박승직상점은 문을 닫았지만 일본 기린맥주의 국내 생산공장인 쇼와기린맥주회사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일본인이 소유했던 적산기업체였기 때문에 광복 이후 미군정청관리 기업체가 됐고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따라 관리지배인으로 있었던 그가 사장에 취임하게
[KJtimes=장우호 기자]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은 1932년 3월 27일 울산에서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집안의 5남5녀 중 다섯째이자 3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1930년생이지만 호적에 2년 늦게 올라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때 의용경찰로 군 복무를 마친 뒤 1957년 동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 동아고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부터 학업과 장사를 병행했다.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에서 장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철지난 쌀을 싸게 판매하려다가 실패한 뒤로 식품의 가격보다 품질을 우선시하게 됐다. 1958년 일본 롯데 부사장을 맡았다. 1962년 일본 롯데 이사로 재직하면서 라면사업에 뜻을 나타냈다. 큰형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라면사업 반대에도 1965년 롯데공업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라면사업을 시작했다. 이를 달가워하지 않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롯데’ 상호를 쓰지 못하게 막자 1978년 사명을 ‘농심’으로 바꾸고 롯데에서 나와 독자노선을 걸었다. 1992년부터 농심그룹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92년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비상임부회장을, 1994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을 맡았다. 롯데공업에서 ‘롯데라면’을 선보인 뒤 19
[KJtimes=장우호 기자]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1955년 2월 14일 일본 도쿄에서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의 2남2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모는 시게미쓰 하츠코씨이며 누나인 신영자 롯데재단 이사장, 여동생 신유미 호텔롯데 고문과는 이복형제 사이다. 일본 아오야마가쿠인 유치원, 초등, 중등, 고등부를 거쳐 1977년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1980년 미국 콜롬비아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마쳤다. 1985년 일본 귀족가문 출신이자 다이세이건설의 부회장으로 있는 오고 요시마사씨의 차녀 오고 미나미씨와 결혼했다. 미나미씨는 한때 일본 황실의 며느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의 중매로 알게 됐으며 주례 또한 후쿠다 전 총리가 맡았다. 1981년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증권에 입사해 런던지점에서 근무하다가 1988년 일본 롯데상사에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다. 1990년 롯데케미칼의 전신인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취임하면서 한국 롯데에 발을 들였다. 1991년 일본 프로야구 구단 롯데 오리온즈의 사장 대행 지바롯데 마린즈로 변경했다. 같은 해 구단주 대행으로 취임했다. 1995년 롯데그룹 기획조정실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