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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칼로 찌른 야쿠자 아직 생존

도쿄 롯번기 야쿠자 오야봉, 딸은 이종격투기 선수

 

30대 후반 역도산 모습

 

1963년 12월8일 일본 도쿄 아카사카 뉴라틴쿼터 나이트클럽. 건장한 체구의 한 남자가 화장실 입구에서 야쿠자 조직원과 시비가 붙었다. 그 남자는 야쿠자 조직원이 건방지다며 뺨을 한대 때렸다. 그러자 야쿠자 조직원은 숨겨놓은 칼로 그 남자의 복부에 칼을 꽂았다. 피로 범벅이 된 배를 움켜쥔 채 쓰러지는 남자. 그가 바로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역도산(力道山)’이다. 이날 상처를 입은 역도산은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12월15일 역도산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전문>
 당시 역도산을 칼로 찌른 야쿠자 조직원은 야마구치조(山口組)와 함께 당시 일본 밤의 무대를 주름잡았던 스미요시가이(住吉會) 소속의 스물네 살 무라타 가쓰시(村田勝志)였다. 그는 역도산을 칼로 찔러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인물이다. 그는 일주일 뒤인 12월 15일 역도산이 사망하자 살해 혐의로 기소돼 7년형을 선고받고 1970년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만든 영화 '역도산'과 각종 자료에는 역도산이 심한 폭행을 하자 무라타가 방어 차원에서 역도산을 칼로 찌른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러나 일본 수사 자료와 당시 아시히 신문보도에 따르면 역도산은 뺨을 한대 때렸고, 그는 얼굴에 약간의 멍만 들었을 뿐이었다.
 ■역도산 뺨만 한대 때려
 때문에 역도산의 심한 폭행은 사실이 아니다.  무라타는 현재 일본 롯번기에서 야쿠자 조직 무라타구미 오야붕으로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무라타구미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조직명으로 일본 3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인 스미요시가이의 분파다. 야쿠자 조직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아마도 역도산을 칼로 찌른 후 자신의 이름을 딴 조직을 만들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일본 프로레슬링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무라타는 역도산 사망일을 즈음해 역도산 묘지를 찾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역도산 묘지에서 지난 일에 대해 잘못을 뉘우치는 지 아니면 형식상 묘지 방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역도산 얘기만 나오면 상당히 곤혹스러워 한다는 것.

 
 ■왜 역도산을 찔렀을까
 역도산이 죽은 지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선 수많은 의혹들이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다. 무라타는 왜 역도산을 찔렀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당시 일본 야쿠자 조직간의 관계를 짐작해야 한다. 1960년대 초 일본 동경 밤의 무대는 스미요시가이가 지배했다. 여기에 동경 긴자에서 조선인으로 주축된 활동했던 '동성회'(東聲會)도 있었다. 동성회 두목은 도쿄 밤의 경찰서장으로 불린 미치이 정건영(일본명 町井久之)이었다. 동성회는 조선인이 주축된 야쿠자였던 관계로 당시 도쿄 야쿠자 사회에서는 이단자로 취급받았다. 역도산은 이 동성회 두목 정건영과 의형제처럼 지냈다. 정건영은 역도산과 출생년도가 같았다. 역도산은 레슬링 흥행 차원에서 이들과 매우 절친했고, 정건영은 역도산의 스폰서 역할을 해줬다.
 ■역도산 제거는 치밀한 작전 
 당시 무라타에게 칼에 찔리자 역도산은 가장 먼저 정건영에게 전화를 걸어 "야쿠자가 나를 칼로 찔렀다"며 피격 사실을 전했다. 무라타가 역도산을 칼로 찌른 것은 우발적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온다. 이는 당시 야마구치와 스미요시 야쿠자간의 세력 싸움에 알 수 있다. 1960년대 초 야마구치는 도쿄에 진입하지 못했다. 오사카를 근거로 활동한 조직이었다. 야마구치가 동경 진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동성회의 도움이었다. 동성회는 당시 야마구치와 의형제 결연식을 가졌을 정도로 막연했다. 야마구치가 동성회간의 결연식이 가능했던 것은 야마구치의 핵심들도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그 핵심의 인물이 바로 역도산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스미요시는 바로 그 핵심을 제거하기 위해 무라타에게 역도산 살해지시를 내렸지 않았냐는 시각도 있다.
 무라타의 당시 직책은 일본 흥행 업무, 즉 조직을 알리는 임무였다. 스미요시가이는 동성회와 대립각을 세웠던 최고의 라이벌 조직이었다. 역도산은 스미요시가이 나와바리(구역)인 아카사카에서 사고를 당했다. 단순한 사고였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박치기왕 김일(왼쪽)이 세계 챔피언에 등극후 스승 역도산 사진 앞에서 챔피언 벨트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역도산 업적 재평가
 무라타는 경찰 조사에서 "절대 죽일 생각은 없었다. 사소한 시비가 붙어 찔렀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역도산을 찌른 후 달아났고, 뒤쫓아 온 동성회 부두목 노쿠치까지 칼로 찔렀다. 역도산이 사망하면서 동성회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스미요시가이가 동경 최고의 조직으로 급부상했다. 또 동성회와 스미요시간의 대전쟁을 멈추도록 중재한 야마구치도 큰 선물을 받았다. 바로 스미요시가이의 묵인 하에 동경 입성에 성공한 것이다.  역도산 죽음이 우발적이 아니라 야쿠자간 세력 다툼으로 인해 의도됐다는 냄새를 풍기는 대목이다.
 무라타는 그후 이 사건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다. 무라타는 도쿄 롯번기에 활동을 하고 있지만 몇년전 한국의 한 기자와 통화 한 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주변에선 여전히 이런 소문이 있다.  무라타가 역도산 죽음과 관련,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무라타가 책을 냈을 경우 역도산 사망과 관련, 어떤 증언들을 쏟아낼지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일본의 한 관계자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살아 있는 야쿠자들은 역도산이 야쿠자 조직원을 마구잡이로 폭행해 방어 차원에서 역도산을 칼로 찌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기정사실화했다"라고 말했다. 역도산 마지막 제자 고트네씨는 "역도산의 묘비 고향을 찾아주는 것도 중요지만 역도산 왜곡을 바로잡는 게 더 급선무"라고 말했다. 한국에선 역도산은 영화 역도산으로 인해 난폭꾼 이미지로 비쳐지고 있다. 살아 생전 김일씨는 "역도산은 일본에서 영웅으로 인정하지만 한국에선 3류 깡패로 인식한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고 밝힌바 있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 사회학 박사 출신인 유연미씨는 "한국에서 역도산 업적을 재평가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경=유구치 리키 기자

 

 

 

 ▲무라타의 딸은 이종격투기 선수로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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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타의 딸 시노하라 히카루

 

이번에 밝혀진 또 하나 사실은 그의 딸이 프라이드에서 격투기 선수로 활약했다는 사실이다.  시노하라 히카루(35·篠原光). 일본의 한 유명 프로레슬러와 염문을 뿌려 화제를 모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딸은 아버지의 전력을 의식한 듯 성을 바꿔 프라이드 선수로 뛰었다.
 시노하라는 솔직 담백하며 아주 자유분방했던 선수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 격투기 관계자는 "시노하라의 별명은 '흰 백합'이다. 시노하라는 사람들에게 습관처럼 '나의 아버지는 역도산을 찌른 남자입니다'라고 먼저 고백하며 살았다"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또 "시노하라는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을 내가 책임지며 살아야 하는가' 반문하면서 내 삶과 아버지 삶은 다르다"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시노하라는 2001년 7월 데뷔전을 치렀다. 격투기 선수로서 실력은 좀 뒤처졌지만 몸매와 뛰어나고 근육은 잘 발달돼 있었다고 한다. 특히 사교성이 있고 쇼맨십도 강해 일본서 인기를 모았던 격투기 선수였다는 것. 조금 햇볕에 그을린 얼굴은 나름대로 귀여운 인상이었다고 한다. 그는 4년전 한국에서도 경기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역도산 친소녀는 프로레슬링 프로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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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도산 친소녀 레미 모모타

역도산 가족 관계는 복잡하지만 한명만 소개할 때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역도산 친소녀 레미 모모타 씨(39)다. 모모타는 역도산과 두 번째 아내 사이에 낳았던 큰 아들의 딸이다. 역도산은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2남1녀를 뒀다. 모모타 아버지인 큰 아들은 일본 게이오대를 나와 레슬링과 풋볼 선수로도 활약했는데 병으로 1999년 11월 사망했다. 레미 모모타 씨는 현재 일본프로레슬링 최대 조직인 노아에서 프로모터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 역도산에 대해 "내가 태어나기 전 할아버지가 작고하셨기 때문에 얼굴한 번 본 적이 없다. 다만 여러 사람들로부터 '역도산은 레슬링 영웅이다'란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고 밝혔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에 4년간 유학도 갔다왔다는 그는 세계 각지에서 거구의 유망 레슬러들을 스카웃하고 또 빅 경기 기획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역도산의 외손자 다무라 게이 역시 일본 대학야구 투수로 활약하는 등, 스포츠 분야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 역도산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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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도산은 한국인이다. 본명은 김신락(金信洛). 함경남도 홍원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20년, 22년, 23년, 24년생이라는 설이 분분하다. 공식적으로는 1924년 11월14일생으로 전해진다. 분명한 것은 함경도에서 씨름선수로 활약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는 1938년 조선씨름대회 우승 후 한 경관의 눈에 띄어 이후 후원자가 돼준 모모타 도모에스케를 소개받는다. 이를 계기로 1939년 일본에 가서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로 개명했다. 이듬해부터 역도산이라는 별명으로 일본 씨름(스모)을 시작한다. 1949년에 요코즈나·오제키에 이은 3위 그룹인 세키와케까지 오르며 유망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일본 제일의 스모선수가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도 조선인이라는 태생적 한계는 그의 성공을 번번이 가로막았다. 이에 좌절한 그는 꿈을 포기한 채 매일 밤을 술로 보낸다. 그러다가 1951년 9월 해럴드 사카다를 만나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 1954년 구라마에 국기관에서 프로레슬러로 데뷔했다. 이후 덩치 큰 서양인, 특히 미국 프로 레슬러들을 당수로 단번에 때려눕히면서 일약 일본 최고의 영웅이 됐다. 패전국 국민으로 열등감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에게 그의 잇따른 승전보는 자신감을 회복시켜주는 쾌거였기 때문이다. 1958년에는 세계선수권자인 J S 루테스를 물리쳐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됐다.
 비록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겨야 했지만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던 역도산은 평생 4번 결혼했다. 그가 칼에 찔린 사건은 그의 마지막 부인인 다나카 게이코와 결혼한 지 반년 만에 일어났다. 동경=유구치 리키 기자


역도산 묘지 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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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묘지는 도쿄 니시마고메 (西馬)역 부근에 있다.  니시마고메엔 혼몬지 (本門寺)라는 큰 절이 있다. 이 역에서 내린 후 혼몬지 묘역으로 10여분만 걸으면 역도산 묘지를 찾을 수 있다. 역도산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묘지 주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역도산 묘지가 어디인가"물으면 친절히 알려준다. 그 절안에는 많은 묘지가 있다. 그 묘지 한켠에 역도산의 무덤이 있다. 하지만 역도산은 죽어서도 그의 출생지를 회복못하고 있다. 그의 무덤 비문에는 출생지가 일본 후견인 고향이었던 '규슈'(九州) 라고 돼 있다. 한국팬들은 "이제 비문 속의 고향이나마 되찾아줄 때가 되지 않았냐"라고 얘기하고 있다.   동경=유구치 리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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