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times=견재수 기자] 재계가 지난해 11월말 녹십자의 정기 임원인사에서 기획조정실장에 故 허영섭 회장의 차남인 허은철 부사장을 이동시킨 점을 놓고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녹십자는 11월말 조순태·이병건 사장 투톱 체제에서 조순태 사장 단독체제로 변경하는 등 정기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공동대표였던 이 사장은 녹십자홀딩스로 이동했다.
녹십자홀딩스와 녹십자셀 대표를 겸직하고 있던 한상홍 대표가 녹십자셀에 집중하게 됨에 따라 이 대표는 녹십자홀딩스로 이동한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인사들의 이동이 있었지만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창업주인 故 허영섭 회장의 차남 허은철 부사장이다. 허 부사장은 해당 인사에서 기획조정실장을 맡게 됐다.
그동안 녹십자에는 영업과 생산, 연구개발 등 부문별로 기획실이 운영돼 왔다. 하지만 흩어져 있던 기획실을 이번 인사를 앞두고 하나로 통합한 후 그 수장에 허 부사장을 앉혔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조금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재계 호사가들은 現 허일섭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는 잠룡으로 허 부사장을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허 회장이 그를 요직에 앉혔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웃 거리고 있다.
현재 녹십자의 회장은 최대주주이자 허 부사장의 숙부인 허일섭 회장이다. 창업주인 형 허영섭 전 회장이 지난 2009년 11월 지병으로 별세한 이후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허 회장이 경영권을 이어 갈 당시 일부에서는 조카인 허 부사장과 경영권을 놓고 경쟁이 불가피 한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당초 故 허영섭 회장 생전 장남인 허성수 전 녹십자 부사장이 회사를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유산상속에서 전면 배제되며 차남인 허은철 부사장에게로 스포트라이트가 모아졌다.
장남인 허성수 부사장은 자신이 유산상속에서 배제된 부분 때문에 모친과 소송을 진행했지만 모두 패소하며 후계구도에서도 멀어졌다.
경영권에 대해서는 허 회장과 조카 허 부사장 사이 한때 지분 매입 경쟁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창업주가 타계하기 약 6개월 전인 2009년 4월과 5월 허 회장은 부인·아들들과 함께 각각 10억원을 투자해 녹십자홀딩스 주식 1만3048주를 매입했다.
비슷한 시기 조카인 허 부사장도 동생 허용준 녹십자홀딩스 부사장과 모친 정인애씨 등이 참여해 37억여원을 투자하고 녹십자홀딩스 지분을 매입했다.
당시 제약업계에서는 이들의 지분 매입을 놓고 경영권 확보를 위한 지분 매입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창업주가 타계한 후 경영권은 동생인 허일섭 회장이 물려받았다. 허 회장은 창업주가 타계하기 한 달 전인 2009년 10월 이사회를 통해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선임됐다.
허 회장으로 경영권이 안정될 당시 허 부사장의 모친인 정인애씨는 2011년 11월~2012년 2월 사이 보유하고 있던 녹십자홀딩스 지분 1.69% 매각했다.
당시 금융업계에서는 남편인 창업주가 유산으로 남긴 주식에 대해 상속세를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은철·용준 형제의 지분을 매각하다보면 경영권 경쟁에서 멀어 질 수 있어 자신의 지분을 대신 내 놓은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했다.
고 허 전 회장은 정씨와 은철·용준 형제 등 직계가족 3명에게 녹십자홀딩스 주식 16만5000주와 녹십자 주식 6만주를 유산으로 남겼다. 이에 대한 상속세는 약 100억원으로 추산됐다.
금감원 전자공시(2013.11.22. 기준)에 따르면 기준 녹십자 최대주주는 허 회장으로 11.19%를 보유하고 있다. 부인 최영아씨와 2세인 진성·진영·진훈씨도 각각 0.32%와 0.27%, 0.27%, 0.23%씩 갖고 있다.
조카인 허 부사장과 그의 동생 허용준 녹십자홀딩스 부사장 그리고 모친인 정인애씨는 각각 2.49%, 2.57%, 1.17%씩 보유하고 있다. 녹십자그룹의 특징은 허씨 일가 친척 모두 많게는 1.59%부터 적게는 0.10%식 지분을 나눠 갖고 있다는 점이다.
창업주 타계 후 허 부사장이 경영권을 놓고 숙부인 허 회장과 본격적으로 경쟁하는 구도였다면 허씨 일가 전체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부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업계 일각에서 허 부사장의 기조실장 이동을 의아하게 여기는 데에는 이처럼 수년에 걸쳐 생성된 배경이 깔려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때문에 앞선 정기 임원인사에서 허 회장이 자신의 경영권 경쟁의 잠룡 격인 허 부사장을 기조실장에 앉힌 부분을 놓고 외부에서 볼 때 예상 외 인사로 보인 다는 것이다.
일단 업계에서는 숙부와 조카 사이 경영권을 놓고 선의의 경쟁을 펼칠지 아니면 허 회장이 조카인 허 부사장에게 자연스러운 경영권 승계를 이어갈지 흐름을 지켜봐야 한다는 시각이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녹십자의 경영승계와 관련해 업계에서도 특별한 얘기가 없다”며 “신년사에서 허 회장이 위기 돌파를 위해 전사적 혁신을 강조한 만큼 허 부사장을 기조실장에 앉힌 것은 중책을 맡긴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자연스럽게 경영승계 움직임으로 봐야 하지 않겠냐”는 조심스런 전망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