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 사람 보는 눈이 생기게 된다. 주변 사람 중 누가 내게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구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주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모든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면 다행이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한 두 사람 아니 많은 사람이 거짓 인맥이었다는 단정을 갖게 된다면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잘 나갈 때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다 내게 좋은 인맥들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사람들 중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선별하게 된다. 가장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리는 듯하면 자신의 어려운 환경에 화가 나기보다 상대에 대한 배신감에 피가 거꾸로 쏟는 듯한 울분이 터져 오르는 건 사람이라면 같은 맘일 것이다. 도를 닦은 듯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라는 사람도 간혹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은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된다. 더구나 상대가 힘들 때 도와주고 함께 해주었는데 언제 그랬느냐는 듯 등을 돌린다면 더욱 울화가 치밀어 화병까지 안게 된다. 힘듬을 겪고 나니 사람 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되 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힘겨움보다 사람에 대한 상처가 더 깊어지게
자신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고 결론을 내려 버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상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면 좋은 평판이 나오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좋은 말들을 하는 부처님같은 사람들도 아주 간혹 있긴 하다. 상대에게 맘을 비운 것인지 누군가에 대해 나쁜 평판을 내리며 말하는 것은 자신의 이미지만 깎아 먹는다는 것을 아는 처세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들을 보면 다시 보게 된다. 고집스럽고 자신이 제일 잘나야 한다는 듯이 사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려는 나쁜 습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람을 아주 잘 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는 자신의 평판은 어찌 남는지도 계산해 보아야 한다. 나쁜 평판을 받는 사람보다 그 평판을 말을 하는 사람이 더 나쁜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도 생각해 보자. 자신에 대해 아주 잘 아는 듯 평가를 내리는 사람에겐 악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남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잣대로 평가를 내리면서 그 평가에 무게를 더 하기 위해 상대를 아주 잘 안다는 듯 말을 보태기도 한다. 말을 듣는 사람들이 “그렇구나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의 평가는 주관적으로 내리게 되는게 일반적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자신과 맞지 않는다면 별로인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평을 내려 버리는 건 일반적 사람의 마음이다. 자신과는 맞지 않아 자신에게는 별로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겐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과는 맞지 않아 자신에게만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신에겐 좋지 않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좋은 평을 받으며 많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신과 맞지 않아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면 자신이 느낀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평가를 내려 버리려 한다. 주관적 관점으로 평을 내리며 주변에 말을 흘리기도 해 당사자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앙숙으로 발전해 버리기도 한다. 자신에 대해 나쁜 평가를 내리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갖게 될까. 누구나 그런 사람에게 나쁜 감정을 갖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 인간관계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람들을 보는 관점과 주관적인 철학에 따라 내 주변의 사람들이 달라지게 된다. 자신의 기분을 잘 맞추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린다. 누구나 자신의 기분을 잘 맞추는 사람에게 맘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자신의 인맥 명부에 올려놓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하는 일에 사람들이 필요해서 많은 사람들을 알기 위해 모임에 나가거나 소개를 받는 경우가 있다. 후자인 사람들은 명함을 주고 인사를 나누고 나면 그 사람과 관계 형성을 하기 위해 먼저 연락을 취한다. 적극적인 사람인 경우는 연락을 취하고 바로 찾아가거나 만남을 가지려 한다. 영업직이라 이런 적극성을 보인다는 것을 상대가 알고 있다면 순수한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오히려 부담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많이 대해 봐 불편함을 느낀다면 만남에 순순히 응해주지 않을 것이다. 먼저 연락을 취하고 만남을 가지려 한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알고 싶다는 느낌을 전달 해 주는 것이 좋다. “만나 뵙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좋은 것이 있어 알려드리고 싶어서 요”라는 말들은 영업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자신의 의도를 바로 드러내 는 것이다. 명함을 주고받아 상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면 이런 말은 뻔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건 당연하다. 오히려 불쾌감을 동반하게 만들 수도 있다. 좋은 관계를 만들어 보지도 못하고 바로 관계 청산에 들어가게 할 수 도 있는 실수
인연과 악연은 서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결혼 전 궁합을 보고 절대 맞지 않는다는 커플이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경우도 있고 찰떡궁합이라는 커플이 이혼이라는 딱지를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 역시 인연과 악연은 서로가 만들어가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악연이 된 경우 자신의 문제점보다는 상대에 대한 원망만 늘어놓는다. 자신도 상대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거나 악연으로 이어지게 만든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고 감정이 추슬러지면 ‘내게도 문제가 있었구나’하며 반성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 중에는 원수처럼 되어 버린 상대와 다시 관계 회복을 이루려 하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상대의 문제 때문에 악연이 되고 원수가 되었다며 상종하지 못할 인간이라는 낙인을 아주 꾹 찍어 버리기도 한다. 죽을 때까지 마주치지 않고 살면 좋지만 살다보면 이상하게 엮이거나 만나기도 하게 된다. 절대 연결될 일이 없는 사람이라 원수가 되어 관계 청산을 했는데 결혼을 앞둔 남자의 친척으로 만나 그 사람 때문에 결혼을 해야는지 말아야는지 고민이라는 사람도 보았다. 군대에서 괴롭힘을 준 상사를 회사에서 만나 회사를 다녀야 하는지 마는지
신뢰는 깨지면 다시 붙이기 힘든 것이다. 깨진 거울 조각을 붙여 들여다 보라. 그 속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일 수 있을까. 일그러져 보이게 된다. 얼마나 잘게 부서졌는가에 따라서 말이다. 사람 관계도 얼마나 큰 신뢰를 잃었는가에 따라 관계 회복이냐 청산이냐를 가름하게 된다. 한번 깨진 신뢰는 상황에 따라 절대 복구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는 신뢰감을 만들어 갈 수 없다. 오히려 불신의 늪이 깊어지게 할 뿐이다. 신뢰감은 사람들에게 어떤 처신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맘은 그렇지 않은데’란 변명만 늘어놓는 것은 더욱 불신만 쌓이게 하는 것이다. 시간 개념이 없는건지 늘 늦게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중요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긴장을 하지 않는 것인지 ‘개념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평소 시간관념이 투철해 늘 일찍 도착하는 사람이 늦으면 ‘무슨 일이 생겼나보다’는 걱정을 앞서게 한다. 늘 늦게 나타나거나 허겁지겁 오는 사람이 늦으면 ‘이럴 줄 알았어.’, ‘하튼 시간 약속을 지키는 적이 없다니까’라며 당연하다는 평을 내리게 된다. 그러다 중요한 사람과의 약속에 일찍 나타나면 ‘아부성이 강한 사람’ 이라는 닉
호의적으로 상대를 배려한다지만 상대는 맘을 열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사람이 다 내 맘 같지 않다’는 푸념이 나오기 마련이다. 피를 나눈 사이에도 이런 감정이 생기는데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끼리 다 통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런 푸념이 나오게 만드는 한 두 사람으로 인해 인간관계를 어렵다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사람의 성향이나 유형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도 ‘아름답다’ 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조잡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당연히 서로의 견해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사람은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 주면 된다. 자신의 견해를 우긴다면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고, 상대의 견해를 인정해 준다면 좋은 관계로 발전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감정 기폭이 큰 사람들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즐거워하기도 하고 같은 상황인데도 화를 내거나 우울해 하기도 한다. 이런 상사나 갑을 가지고 있다면 늘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다. 노심초사 한 다고 상대는 달라지지 않고 자신만 주눅이 들거나 정신적으로 힘겨움을 안게 되는 건 뻔하다. 이런 사람에게 “감정기폭
만났을 때 인사를 잘하는 사람이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만들고 기분 좋게 만드는 건 당연하다. 이런 인사도 중요하지만 상황에 따라 놓치지 말고 인사성을 보여주는 것이 예의와 인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마운 줄을 몰라”, “미안한 줄을 몰라”, “양해를 구할 줄 몰라”는 말들을 타인에게 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인사성 없는 것에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에 대해서는 이렇게 흉을 보듯 이야기 하면서 자신은 남들에게 인사성을 놓치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어도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된다. 친분이 있지는 않았지만 업무상 아는 분의 아내이기에 몇 번 어울려 식사를 한 분이 있다. 경우를 따지는 듯하고 조용한 성품이라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인사 문자를 보내면 답이 없다가 자신이 필요한 때는 시간 관계없이 연락을 해 거리감을 두고 싶게 만들었다. 문자나 카톡도 답이 없으면 친분 관계를 떠나 기분이 불쾌해지기도 한다. 더구나 카톡은 상대가 보았는지 알 수 있으니 보고도 답이 없다면 오해도 하게 되고 기분이 상하게 된다. 사회생활을 안 해 그러려니 이해를 하려 했는데
친한 친구 사이에도 주거니 받거니 해야 자주 교류를 이루고 오래도록 관계 유지를 해 나가게 된다. 한쪽에서만 주는 관계는 사람인지라 주는 입장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얄미운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서로 소원해지는 관계가 되고 ‘언젠가 친했던 사이인데…’라는 과거형을 만들기도 한다. P는 친한 친구인 R이 명퇴를 당하고 보험 일에 뛰어 들어 제일 먼저 보험을 들어주고 주변에 적극적으로 영업을 도와주었다. 생활고에 힘들어 하는 친구를 보며 안타까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P덕에 친구인 R은 실적유지를 해 나가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관계를 통해 보험직에 자리를 잡게 되고 종자돈을 만들어 부업도 하며 넉넉한 살림살이가 되었다. 서로가 더 끈끈한 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P가 회사가 어려워져 직원들이 물건들을 팔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회사 경제가 살아나지 않으면 직원들이 실직자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제일 먼저 보험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고 또 힘들 때 자신이 도와 준 적이 있는 R을 찾아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어렵사리 말을 꺼낸 P에게 “나도 형편이 썩 좋은게 아니라서…몇 개는 사줄게”라는 답을 들으며 서운한 감정이 들
사람 관계는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생활에서는 을의 입장이거나 종속관계로 이루어져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수동적 관계가 만들어 지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관계이거나 갑과 을을 떠난 사회적 관계는 일방적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기 어렵다. 일방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면 거리감을 두거나 관계 청산을 하려 드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이다. 많은 사람들과 호의적이고 친분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좋은 감정을 내비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 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기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또한 자신이 커피를 쏟으면 ‘실수’를 한 것이고 남이 커피를 쏟으면 ‘칠칠맞거나 주의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한다. 이런 평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유쾌할 수가 없는 건 당연하다. 자기 보호본능이 강한 사람이라면 이런 평을 내리는 사람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어 악연으로 이어지게 되는 건 뻔하다. 자기 본위적 사고가 강한 사람들은 좋은 관계보다는 나쁜 관계에서 악연으로 번지게 되는 실수를 자주 범하게 된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늘 같은 실수와 상처의 반복만 이어
사람관계에서 가장 힘들 때가 ‘내 맘 같지 않다’고 느낄 때이다. 사람은 상대적이라고 하지만 내 맘 같지는 않아도 배신감을 갖게 되면 사람관계의 한계성을 느끼기도 한다. 순수성을 가지고 사람관계를 만들어 가는 사람 중에 이런 씁슬함을 자주 맛보게 된다. 아무런 의도를 가지지 않고 사람이 좋아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픈 바램으로 대인관계를 하는 사람들 일수록 상대가 의도를 가지고 대하게 되면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사회에서 만났으니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신의 문제점도 있다. 그렇지만 사람인지라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떤 생각으로 만나느냐에 따라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사람이 좋아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친분을 맺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도움을 받고자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 유지를 해 나가려 하기도 한다. 사람들로 인한 상처를 줄이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려면 자신의 생각부터 바꾸는 것이 현명함이다. 사람관계는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처럼 순수성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그 국장님과 잘알지…”, “그 대표님한테 나에 대해 물어보면 잘 알껄…”하며 누구누구와 잘 안다는 듯한 인상을 주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인맥을 자랑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한 번 본 것 같은데…”, “누구지?”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어떻게 명함을 주고받고 그 사람에 대해 파악하고는 습관적으로 잘 아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잘 알지 못하는데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을 들은 당사자는 황당하고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심하면 거리감을 두어야 할 사람이라는 낙인까지 찍어버리고 말게 된다. 한두 번 본 사람이 자신과 잘 아는 듯 말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상대가 자신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이라면 기분이 나쁘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파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불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맥 형성을 위해 여러 모임들을 다니며 명함을 모으듯 명함집에 넣어두고 그 사람들의 직업, 직책, 사무실 위치 등을 외우고는 한번 본 사람인데도 자신과 잘 아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한번 만나도 그 사람이 했던 말들과 그 사람에 대해 기억해 두고 말을 당사자는 황당함을 느끼기도
북미 쪽 사람들의 명함을 보면 대학원이상의 학위를 표기해 둔다. 서구 유럽에서는 회사 설립년도까지 표기해 전통을 보여주며 신뢰감을 높이려 한다고 한다. 자신이나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명품을 즐기거나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교육 중 명품을 갖고 싶거나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남들이 알아주니까’, ‘브랜드 가치 때문에’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A급 짝퉁을 만만치 않은 가격을 주고 사는 것도 명품을 지닌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받고 싶은 욕망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만족보다 남이 알아주는 것을 즐기고 싶은 심리가 더 강한 것이다. 이렇듯 브랜드 가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게 만든다. 사람도 브랜드화가 필요한 시대이다. 브랜드 가치는 경쟁력 우위를 갖게 하고 남보다 앞서가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사람 관계에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중요하다. 좋은 이미지로 많은 대인관계를 가지지만 사회적 성공으로 끌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사회적 성공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브랜드가 중요한 것이다. 스펙이 사람의 브랜드를 높이는데 큰 몫을 하게 된다. 그래서 스펙을 쌓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자신이 못한 것을 자식대에는 이루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자수성가형이나 성공을 꿈꾸는 이들은 이렇듯 ‘내 자식은 어려서부터 스펙을 만들어 가게 해야 한다’며 열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좋은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 스펙을 만들어 간 사람들이 뒷받침 없이 스스로 스펙을 만들어가며 노력하는 사람들보다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쉬운 것은 사실이다.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공부에 열을 올려 장학금을 받아가며 좋은 학교를 나와 성공의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정 스펙의 판도를 바꾸어 놓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공부를 더 잘하는 듯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부모의 뒷받침으로 공부를 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간의 진도차이가 생긴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공부로 성공을 만들어 가는 것보다 좋은 가정 속에서 공부도 잘 해 나가는 것을 더 많이 보게 되는 게 현실이다. 중년이상이 된 사람들은 여러 교육을 다 받고 사회에 들어온 후배들을 따라잡기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학이나 컴퓨터 등 여러 교육들을 학교에서 받고 나온 요
태교로 인해 좋은 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지만 살아온 환경이나 교육에 의해 인성은 바뀌게 되는 듯하다. 천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타고난 천성이 있다지만 살아가면서 바뀌기도 하는 듯하다. 환경이나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서히 바뀌면서 굳어지는 것이 그 사람의 인성으로 자리 잡는 것 같다. 숫기가 없는 것인지 인사성이 없는 것인지 했던 사람이 싹싹하고 붙임성 있게 변하는 것을 보면 살아가는 환경에 의해서 변하는 건 분명하다. 물론 내면에 가지고 있는 것이 끄집어 내지기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지고는 있지만 드러내지 않았던 것들이 사회생활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 일수도 있다. 가족들에게 걱정스러운 자식이 사회생활에서는 유연하고 당당하게 잘 해나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을 보면 잠재적 사회성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면에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이 표출되지 않다 사회에서는 표출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기는 하다. 타고난 듯한 착한 성격, 남부터 배려하는 모습들은 후천적인 것보다 선천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성선설이 맞는지 성악설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악한 사람을 보면 성악설이 맞는